작성일 : 2016-05-03 (14:59)
[위도의 역사-3]조기파시와 위도 사람들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560

 

▲위도파시/항구와 여인들(경향신문 1961년)

"조기 판 돈 세다가 말캉 무너졌다"
[위도의 역사-3]조기파시와 위도 사람들

조기파시와 위도 사람들

파시(波市)는 조선 전기부터 소규모로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기에 와서는 중개인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파시가 형성되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발달된 고기잡이 기구와 다양한 유통 경로 등이 생기면서 활발해졌다.

위도 조기파시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매우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파시로 인해 위도 지역에는 많은 변화와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났다. 위도 파시는 진리에서 먼저 형성되었다가 1920년대에 치도리로 옮겨간 것으로 이해된다. 어장에서 가까운 곳은 치도리였고 이곳은 넓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에 서해안에서 조업하는 안강망 어선이 많이 모여들었고, 이 무렵 칠산바다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은 치도리 앞바다인 형제섬 근방이었다.

1940년대 초에는 수심이 깊은 파장금으로 옮겨간다. 이유는 연안 수자원이 고갈되면서 연근해로 진출해야 할 필요성으로 대형화되는 어선이 등장하면서 수심이 깊은 포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치도리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썰물 때 바닥이 들어날 정도여서 대형 선박의 출입이 불가능했다.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했던 파장금 마을은 치도리의 파시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위도를 대표하는 어항이 되었다.15)서종원, 「위도 조기파시의 민속학적 고찰」,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4, 95쪽.


▲1930년대 위도 치도리/전국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어 장불엔 더 이상 배 댈 곳이 없어 보인다.<사진출처: 『개도100주년 기념 사진집-전남100년』, 전남도청, 1997년 간>

외지인들이 잡은 조기는 상고선에 의해 처리하는 방식이 유력했다면, 자본이 적은 위도 주민들은 개인이나 친척끼리 작은 배를 가지고 연근해 어장에서 조업하여 잡은 고기를 염장하거나 덕장에 말린 다음 줄포장이나 법성포 등에 내다 팔았다. 조기파시에 전국에서 모여든 어부들은 치도리 해안을 따라 길게 움막을 치거나 임대해 놓은 집에 거주하였다. 장사들도 몰려들었는데, 어부들을 상대로 생활필수품과 어구 등을 판매하던 선구점·잡화점 등도 생겨났다. 어부 등을 상대로 하는 유곽엔 손님이 그치지 않았다.

간이 이발소, 목욕탕들도 운영되었다. 일제 강점기 조기파시의 중심지인 치도리에는 파시철이면 외지에서 온 연희패들이 공연하던 공연장이 별도로 있었다. 이들은 파시가 끝나면 위도에서 철수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신안군 임자도 타리 지역에서는 ‘위도에서 벌어서 타리에서 털어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도지역의 파시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얘기한다.16)서종원, 같은 논문, 2쪽. 위도파시는 1970년대 초를 전후하여 위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근영은 위도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얘기를 ‘변산반도 탐승기’에 기록했다. 파시가 서면 위도에 모이는 어선, 임시우편소, 술집에 있는 작부들의 노래로 위도가 떠나갈 듯 했다고 한다.

채석강에서 좀 멀리 떨어져 위도라는 섬이 석양의 나무숲처럼 은근하게 보인다. 여기가 곧 파시로 유명한 곳이다. 해마다 한식 때부터 입하 때까지 수천 척의 어선이 이 섬으로 모여들어 팔고 사고 생선장이 벌어진다. 이때 면에는 임시우편소도 생기고 요리집도 생기어 주야분별 없이 그칠 줄 모르는 노래와 장고 소리로 섬덩이가 떠나갈 것 같다는 것이다.17)「동아일보」, 1938. 7. 18.

위도에 출어한 어부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는데 조선인 230인, 일본인 250인이다.(동아일보, 1924) 목포와 위도 등을 연결하는 무선전화를 체신당국이 임시로 설치하도록 한다. 이것은 연락체계가 형성되지 않으면서 어업자와 상인 간 상품 취급상 막대한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기간은 4월 20일부터 6월 24일까지이다.(동아일보, 1938) 이처럼 고기잡이가 벌어지는 어장인 위도에 우편소를 설치했다는 것을 신문에서 다룰 정도로 위도의 조기파시는 중요한 기사거리였다.

1938년에 조기잡이로 위도를 중심으로 모여든 어선은 2백 척의 다수인 동시에 그 승조원은 1천 300여 명이라고 한다. 위도에는 요리점 9개소, 음식점 11개소가 생겨서 대 번창 중이며 당국에서는 무선전화를 준비하여 목포 무선전화국과 교신하도록 하였다.18)「동아일보」, 1938. 4. 22.

위도에서 전해지는 말 중에 “이준수, 조기 판 돈 세다가 말캉 무너졌다.”는 말이 있다. 너무 돈을 많이 벌어 돈을 세다가 돈의 무게 때문에 마루가 무너졌다는 우스갯소리다. 조기로 인해 경제가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법성포와 줄포는 위도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줄포 포구에는 삼양사 등 정미소가 있어 위도에 필요한 쌀을 공급하였다. 위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로는 겨울 한철도 버티기가 어려웠으니 쌀 등 생필품을 들여와야 살 수 있었다.
  
고단한 삶을 보듬고 가다

바다는 풍랑으로 섬사람들의 생명을 노린다. 70명의 어부의 생사가 불명이라는 1927년의 기사, 태풍으로 400여 어선이 조난사고를 당했다는 1948년의 기사, 곰소에서 위도를 향해 1959년 4월 22일에 출발한 통도호 침몰사건에는 구조작업 절망이라는 기사가 따른다. 위도의 조기잡이가 항상 성한 것은 아니었다. 아래 1931년의 기사처럼 조기가 잡히지 않으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조기의 명산지인 전남 영광의 위도는 작년 혹독한 불어(不漁)와 그 뒤를 이은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매년 그 이듬해에 어산(漁産)으로 변상할 것을 조건으로 줄포방면에서 조달되는 식량이 전면 두절되어 700 어민의 생활은 완전히 기아선상에 방황하고 있다.19)「동아일보」, 1931. 2. 10.

위도가 섬이지만 육지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마냥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증언에 따르면, 한말에 일본수비대가 의병을 찾으러 위도에 들어왔다 한다. 부안 변산을 중심하여 활동하던 의병들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일본군들의 공격을 피하느라 섬 등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위도에 들어온 일본수비대는 호적대장에 없는 자는 의병으로 간주하여 죽이려 했다. 그때 대리마을 구장인 이도법은 이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내가 게을러서 이들을 호적에 미처 못 올렸습니다. 나를 죽이시오.” 하자 일본수비대가 감동하여 섬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석에서 호적에 올렸는데, 김감탕이니, 김짝귀니, 꺼꾸리니 하는 이름들이다.20)이형식 증언, 위도면 대리 출신, 1937년생.

일제 강점기 일본은 섬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어업조합과 면사무소와 학교를 세워 위도 사람들을 통제했다. 위도어업조합은 1919년 3월 28일에 창립되었지만 1928년 12월에야 인가를 받았다.『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위도 어업조합은 위도면 진리에 위치했고 위도의 파시를 비롯한 선박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1929년 영광수산지회 총회에서 5가지 현안을 진정하게 된다. “1.치도리 축항문제 2.법성, 위도, 낙월면의 순회선의 실시 3.공립보통학교 설립 4.어업조합규약 확장 4.음료수정호개착” 등이다. 위도에 제대로 된 항구가 없어서 어획물을 육지에 올려 소비시키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매매해야 하는 점 등에 대해 주민의 불만이 컸다. 섬 생활의 어려움과 소외에 대한 진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총독부 소속관서직원록』에는 위도면장의 기록이 있다. 1919년에 면장을 맡은 김형근(金炯根)을 시작으로 김인서(金仁瑞)는 1931년에서 37년까지 이어진다. 김광술(金光述)은 1939년부터 이름이 올라 있다가 41년에는 창씨 개명하여 김포광술(金浦光述)로 이름을 바꾸며 면장을 이어갔다.


▲위도 갯가를 줄달음쳐 등교하는 아이들(경향신문 1962년)

1930년 9월에 개교한 위도보통학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1931년의 촉탁교원 홍덕행(洪德行)과 훈도 김지호(金支鎬)다. 김학영(金鶴榮)은 1932년 훈도로 시작하여 1938년부터는 위도심상소학교 훈도로 1940년까지 근무한다. 역시 김사엽(金四葉)도 김학영과 같은 기간에 근무한 것으로 나타난다. 1941년부터는 일본인 코바야시 에이조(小林榮三)와 코바야시 료우꼬(小林綾子)가 훈도로서 위도국민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학교가 만들어진다 해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은 소수였다. 월사금이라는 수업료를 내고 배우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1932년에 위도에서 학교나 서당에 다니고 있던 학생은 91명으로 파악된다.21)「동아일보」, 1932. 11. 29. 이것은 1면 1교라는 목표로 학교가 세워진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사는 위도에 의사는 1명도 없었다. 부안 지역에서 의사가 없는 지역은 행안면과 위도로 수련의라도 배치될 지역으로 고려되었다.

1960년대만 해도 섬 주민들이 많아서 이곳에 들어온 정치인들은 ‘존경하는 위도 5,000 도민 여러분’이라는 수사를 쓰기도 했다.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장불에 1주일 이상씩 포장을 치고 위도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22)서봉신 증언, 위도면 진리 출신, 1953년생.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아래 기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1962년 특집기사로 제목은 ‘동심’이다. 내용은 작년과 재작년을 통틀어 위도초등학교에서 육지의 중학교로 진학한 아동은 두 사람 밖에 없다는 것이다. 490명의 재적자 중 올해 교과서를 산 아동은 15% 정도에 불과했다. 선생님이 소풍가는 날짜와 장소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을 끈다. 그 이유는 소풍간다는 날짜를 알려 주면 괜히 집에 가서 ‘신 사달라’ ‘점심 싸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경향신문」, 1962. 5. 3.

한때 ‘기(게)도 돈 천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위도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온배수 문제로 수온이 올라가면서 고기가 떠났고,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물길이 바뀌어 흙들이 위도 바다 밑에 쌓이면서 산란 장소를 잃은 고기들도 위도를 떠나버려 바다에 삶을 기대고 사는 위도 사람들의 시름도 깊어졌다.

위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드러내고 기억하는 것은 위도 사람들을 잊지 않고 공감하려는 작은 실천이다. 또한 이것은 풍랑 속에서도 기약 없는 어려움을 떠안고 바다 위에 삶을 기대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위도의 민초들에 대한 헌사이다.


<끝>

/정재철(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3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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