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4-12-16 (15:02)
[부안 문화재 답사-25]서외리당간지주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2554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서외리당간지주. 간주에는 세 마리의 거북이 양각되어 있는데 그 중 두 마리는 아래를, 다른 한 마리는 위를 향해 있는 희귀한 장식적 표현을 하고 있다.ⓒ부안21


 

"당간에 마을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빌고..."
[부안 문화재 답사-25]서외리당간지주

 

서외리당간지주
종 목: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  
명 칭:서외리당간지주(西外里幢竿支柱)  
분 류: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불교/ 당간  
수량/면적:1기
지정(등록)일:1974.09.27
소 재 지: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287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국유
관리자(관리단체):부안군

부안읍성 서문 밖(서외리)과 부안향교 중간 지점에는 석당간(石幢竿) 한 기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세웠으며, 당간은 네 토막의 돌기둥을 잘 다듬어 이었는데, 돌기둥의 안쪽 면을 접합시켜 2개의 철정(鐵釘)을 박고, 철정을 박은 위에 각각 철띠(鐵帶)를 둘러서 고정시킨 특이한 형태로 높이는 7.45m에 이르나 꼭대기 부분에 잘려나간 흔적이 있어 원래는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간의 상단부인 세 번째 간주(竿柱)의 중간쯤에는 용이 당간을 감아 오르는 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높이 3.5m 지점인 두 번째 간주에는 세 마리의 거북이 양각되어 있는데 그 중 두 마리는 아래를, 다른 한 마리는 위를 향해 있는 희귀한 장식적 표현을 하고 있다. 당간 남쪽 아래 부분에는 「崇禎後四四年 辛亥 四月 日 立石(1671년, 조선 현종 12)」이라는 명문이 있고, 그 옆에 「崔哲ᤝ 崔石ᤝ」이라는 2줄의 인명이, 그 아래에는 「坐位」라는 명문이 있다. 또 오른쪽 지주석에는「育任 金尙吉 崔世俊 崔錫胤 姜載文」왼쪽지주석에는 「木干ᤝ安密奴 水鐵匠鳴鶴 鄭付吉 ᤝ尙」등의 명문이 있다.

그러나 당간의 조성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예부터 내려오던 당간이 붕괴되자 이 해에 다시 세우면서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절 앞에 설치했던 건조물로 큰 법회나 불사 등을 행할 때 당기(幢旗)를 거는 깃대를 말하며, 이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양쪽에 세우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당간지주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것이며, 그 이전에 조성된 예는 남아 있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예로는 부석사당간지주(浮石寺幢竿支柱, 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기단부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금산사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와 같이 안쪽 면을 제외한 각 면에 종선문(縱線文)을 조식(彫飾)하고 주두(柱頭)도 원호(圓弧)를 이루었으며, 간대와 기단 등 각 부분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만복사지당간지주(萬福寺址幢竿支柱, 보물 제32호)가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거대한 규모의 당간이나 지주가 조성되지는 않았다. 법주사의 당간과 같은 경우도 원래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지주에 당간만을 근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는 대개 작고 낮으며 선문 등의 조식이 없는 지주에 목조의 당간을 세웠는데, 그나마 지금은 당시 중창한 여러 사찰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서외리당간지주가 서 있는 서외리 일대 어디에서도 옛 절터의 흔적이나 이에 관한 문헌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다만 전라북도에서 간행한 사찰지(1990)에 "(서외리)당간지주의 기단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들 중에 파괴된 석불편(石佛片)이나 건조물의 기단석 등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포함돼 있고, 그 북편부(北便部)에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평와편(平瓦片) 및 토기편(土器片)들이 다량 산재해 있어서 고려시대에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사람들은 이와 같은 순수 불교적인 시설물을 짐대라 부르고, 이 지역을 짐대거리라고 부른다.

짐대는 배의 순항을 돕는 돛대를 말한다. 그런데 솟대나 당간 등이 풍수설의 행주형(行舟形) 마을에서는 허다히 짐대로 불려지고 있다. 튼튼한 짐대 없이는 행주형의 마을이 순항(번창)할 수 없다고 믿는 민간신앙과 습합되어 생긴 명칭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은 액운과 재난이 예상될 때는 이 당간에 기를 걸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정초에는 이 당간에 마을의 안과태평을 빌고 액운을 물리치도록 축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러한 풍습은 사찰의 행사에 쓰이던 당간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면서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사찰지]-1990-전라북도, 김형주의 [부안땅·마을이름]-2013-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허철희huh@buan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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