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입석 정미소 모습/한창 바쁜 때는 바깥까지 나락이 나래비를 선다.

"조산평 쌀 먹으면 송장도 무겁다는디"
[부안이야기]아랫선돌 방앗간 이야기

해방 후에도 한참동안은 양조장과 방앗간이 농촌 경제의 두 축을 이루었다. 양조장이나 방앗간 집 자녀들은 도시락 반찬부터가 달랐으니까. 거기에다 하나 더 끼어준다면 쌀집 아들 정도가 씀씀이가 푸졌다. 그때 우리들 대부분은 용돈이 뭔지도 모르고, 남들 먹는 것에 입맛 다시다가 집에 가서는 소쿠리에서 찬 고구마나 챙겨먹던 시절이었다.


방앗간에 대한 기억 몇 조각

양조장 마당 덕석에는 하얀 꼬도밥이 누룩과 섞여 익어가고, 방앗간 집에는 귀한 흑백 티비가 우리들을 가끔씩 기다린다. 김일 레슬링이라도 있는 날이면 방앗간 마당에다가 티비를 내 놓는 선행을 했는데 우리들은 앞자리를 차지하러 저녁밥도 거른 채 몰려들었다. 상대 선수가 철제 의자를 들고 우리 선수 뒤로 다가서면 우리는 매번 크게 소리치지만 우리 선수는 맥없이 당하기만 한다. 거기다가 피까지 흘리면 “저렇게 피 흘리다가 죽으면 어쩐대여!” 그러나 이런 걱정은 김일 선수의 박치기 두세 방으로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다. 왜 첨부터 비장의 무기인 박치기를 쓰지 않고 아꼈다가 막판에만 쓸까. 화투판에서 어른들이 자주하던 ‘초장 끗발, 개 끗발’이 되지 않기 위해서 몸을 사리다가 그러는가 보다고 생각도 했다.

그나지나 없이 사는 농촌에서는 양조장의 꼬도밥에서 풍기는 냄새조차도 은혜로웠고, 방앗간에서 큰 소리로 돌아가는 발동기는 백열등의 불도 밝히고 나락도 하얀 쌀로 바꾸는 신기한 요술램프였다.

정미소(精米所)란 이름이 쓰였지만 방앗간이란 말도 많이 썼다. 방아 찌러 간다고 했지, 정미하러 간다고 하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 막둥이고모랑 리어카에 나락을 싣고 방앗간에 가서 순서를 기다린다. 나락 들어가는 구멍에 나락을 집어넣고 있으면 쌀겨도 나온다. 가끔씩 쌀의 상태를 확인하는 주인아저씨의 손놀림도 예사롭지 않다. 발동기 소리에 서로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잠시 후면 맵재(왕겨)가 나오는 방앗간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마구 쏟아지는 맵재를 얼른 가마니에 담아야 한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지만 빨리 일을 끝내야 다음 번 사람 것하고 섞이지 않는다. 머리부터 눈썹까지 온통 먼지로 한 꺼풀 입고 뒷목에 들어간 맵재 때문에 따끔거리기 시작하면 덩달아 온몸이 근질거린다.


▲정미소가 부지런히 돌아가는 2014년 11월, 얘기를 나누는 이현기 사장 부부(오른쪽)


조산평 쌀 먹으면 송장도 무겁다는디

이 글에서는 하입석 정미소를 살피고자 하는데, 필자는 ‘아랫선돌 방앗간’이란 친근한 이름도 함께 쓰고자 한다. 이곳을 둘러싼 환경을 살펴보면, 보안면은 변산 언저리에 닿아 있고 야산이 많아 밭은 많고 논은 적은 편이다. 선돌을 중심으로 웃선돌(상입석)과 아랫선돌(하입석)로 나뉜다. 아랫선돌은 동진강 지류인 고부천 주변이라서 홍수 때는 물이 쪄서 나락이 온통 물에 잠기는 호수가 되어버린다. 바닷물을 막는 갑문이 설치되기 전에는 감조하천인 탓에 강물이 바닷물과 함께 넘치면 논의 염기를 빼내느라 몇 년 동안 농사짓기도 어려웠다.

보안면에 남포저수지가 있지만 저수량이 많지 않아 넓은 지역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논에 따라 작은 둔벙을 파서 가뭄에 대비했다. 지금은 경지정리 이후 둔벙이 없어져 지하수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이다. 들판이 크지는 않지만 조산평(상입석과 하입석 사이, 녹두밭 웃멀)과 멍에들(하입석과 신흥리 사이)이 있다. 수랑들(월천)은 작은 물줄기가 사철 흘러 물이 마르지 않았다.

여기서는 ‘조산평 쌀 먹으면 송장도 무겁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을 갖는다. 조산평(造山坪)이 기름진 곳이어서 이 쌀을 먹은 사람은 죽어서도 몸무게가 나간다는 것이 하나라면, 두 번째는 좀 독특하다. 조산평은 비가 오지 않으면 모내기가 어려운 천수답이다. 이곳에서 모내기를 할 수 있다면 다른 지역도 다 심을 수 있으니 풍년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산평 쌀을 못 먹은 사람이 태반인데, 어렵게 얻은 조산평 쌀을 먹을 정도라면 잘사는 사람이거나 풍년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시체도 무겁다는 얘긴데, 필자는 두 번째 해석에 마음이 간다. 어렵게 얻은 조산평 쌀을 먹은 사람은 죽어서도 고마움과 감동으로 평안하게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상여꾼들은 상여가 무거우면 별 시덥지 않은 얘기를 다 나누는데, “혹시 조산평 쌀을 먹어서 이처럼 무거운 것 아니냐”고 힘든 어깨를 기대며 서로를 격려했던 것 아닐까.

김형주의 책1)에는 두 번째를 뒷받침하는 얘기가 소개된다. 조산평이 메마른 천수답의 척박한 들녘으로 유명하여 임금님도 “올해 조산들 농사가 어찌 되었는고?” 하고 물어 “흉작은 면했다고 합니다.” 하면 “허! 대풍이로고” 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아랫선돌 방앗간은 언제 생겼을까

일제 강점기에 만든 『부안군 군세일반』에서 부안의 주요 공업의 가장 앞 순서로 든 것이 정미업(精米業)과 주조업(酒造業), 누룩제조업이다. 농경사회에서 벼를 정미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힘든 농사일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값싸고 배부른 술이다. 따라서 이 술 만드는 일 역시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것은 아래 도표로 확인할 수 있다.



부안의 정미업자로 신동근3)을 주목한다. 그는 부안 정미업의 개척자로 평가되며 1910년에 부안에 신동근정미소를 시작했고 1936년에는 20마력의 발동기와 최신 건조기를 설치한다. 종업원이 50명에 이르고 줄포에도 지점을 설치했다.

부안의 자본가들 중에 정미업에 투자한 사람들은 신동근 외에도 여럿이다. 백산의 와까야마(若山榮治郞), 줄포의 김상근, 삼양사, 김종철 등이다. 주산에는 미츠나가(松場) 주산지점 정미소가 있었고, 하서의 큰다리에도 미츠나가(松場) 대교지점이 있었다.

이들 정미업자들은 자신들의 친목과 이익을 위해 미곡상 조합을 만든다. 백산미곡상조합(1929년 조직), 줄포미곡상조합(1929년 조직), 부안미곡상조합(1928년 조직) 등이다. 여기서 부안미곡상조합을 살펴보면4), 이들은 산미개량증식, 정미업, 이출업(移出業) 등을 내세우는 지방 최대 상공업단체이다. 조합장은 이영일, 이사는 신영찬이다. 평의원은 신동근, 미츠나가(松場) 읍내지점, 신영상, 쿠보(久保幸一), 류재길, 미츠나가(松場) 대교지점, 이희정, 오권봉, 임종백 등 동업자를 망라하여 부안군 읍내에 미곡상조합 본부를 두었다.

미곡상들은 여러 곳에 문어발식으로 지점을 두고 이득을 극대화했다. 이들 미곡상들은 정미업에 머물지 않고 쌀을 이출(移出)했고, 이들 쌀을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콘도오(近藤哲夫)가 곡물검사소 군산지소 부안출장소장으로 근무를 시작한다.5)

일제 강점기에 보안면에 정미소가 없으니 인근 줄포나 주산 등지로 쌀 방아를 찧기 위해 나다녔을 것이다. 해방 후가 되면서 정미소가 없던 지역에서는 여기저기에 소규모의 정미소가 들어선다. 하입석에 정미소가 생기기 전에는 줄포 신흥리, 영전, 반평리, 수랑들에 정미소가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하입석에 언제부터 정미소가 들어선 것일까? 이것저것 들추어 봐도 자료로 남아 있지는 않다. 해방 후 자료에는 부안의 정미소 수나 운영에 대한 통계나 글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랫선돌 방앗간을 농협에서 인수하여 운영했는데 김정중(하입석, 80세)은 1974~76년 시기에 공장장을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아랫선돌 방앗간은 해방 후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구루마 발동기라고 해서 발동기를 가지고 다닐 정도의 소규모 방앗간을 움막 같은 데서 시작하더니 헛간식으로 고쳐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창고식으로 바꾸어서 기계를 돌렸다고 한다. 기억나는 운영자는 은길동(월천)-김병태-김형구-박병호(상입석)-농협인수(김정중, 송철주)-민정기-이현기로 이어진다.


▲나락이 처음 들어가는 투입구


여럿이 잡아댕기는 발동기

가장 간단한 도정(搗精)은 도구통에 벼를 넣고 도굿대로 오랫동안 찧어서 껍질을 벗겨낸다. 전통적인 디딜방아, 물방아, 물레방아, 연자방아에서 매가리간, 방앗간, 정미소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정미소도 운영자가 직공 없이 혼자서 소규모로 운영하다가 일하는 사람들을 한두 명 두더니 농협이 운영할 때는 관리자 1인, 공장장 1인, 기계보조자 1~2명 등이 있었다. 1년 새경은 한 가마에서 시작하여 70년대 중반에는 7~8가마에 이르더니 14~15가마까지 올랐다.

아랫선돌 방앗간에서는 일이 많아지면서 건물 규모나 발동기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구루마 발동기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뱃기계라 불리는 큰 발동기를 들여와 사용하였다. 이것은 배에서 이용한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올려다볼 정도로 높고 올라간 듯 보였다. 이 발동기는 혼자서 시동을 걸 수가 없었다. 장정 너 댓 명이 줄을 달아서 잡아 당겨야 겨우 시동이 걸릴 정도로 거대했다. 이런 발동기도 전기가 들어오면서 생명을 다하고 전기모터가 발동기를 대신했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흰쌀밥을 좋아하는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7분도 쌀을 권했다. 이 정도면 거의 현미 수준인데 쌀이 노랗게 보였다. 만일 이 규정을 지키지 않다가 단속에 걸리면 3개월 영업정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소비자는 9, 10분도를 선호하니 단속이 있다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정미소에서는 흰쌀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햇빛이 사방간디서 들어온다


햇빛이 사방간디서 들어오는

아랫선돌 방앗간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 자리에 있었다고들 얘기한다. 천장의 연자를 보면 조그마해서 옛날 것임을 곧 알아챈다. 햇빛 좋은 날 가보면 옆쪽에 바람구멍이 나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새들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참새방앗간이란 말이 생각나는 방앗간이다.
이렇게 구멍이 많이 난 이유 중 하나는 정미소에는 먼지가 많이 나서 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깥과 통하도록 틈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하던 사람들은 이런 먼지구대기 속에서 일하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먼지를 해소한다고 믿어서 가끔 고기를 사다가 끓여먹기도 하고 삶아 먹기도 했다.

현재 아랫선돌 방앗간은 7번째 주인인 이현기(55세)가 아내 임득남과 함께 운영한다. 1993년부터 운영했으니 23년째가 된다. 방앗간 운영과 농사를 짓던 그가 한때 군의원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내 본업으로 돌아와 다시 농사와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다.

도정료는 80㎏에 5㎏이 삯이었는데 지금은 4㎏이다. 현재 시세로 보면 8,000원 정도다. 전에는 쌀로 도정료를 주었지만 지금은 돈으로 주는 경우도 있다. 쌀을 담는 데는 80㎏ 가마니를 쓰다가 60㎏ 마대를, 10년 전부터는 방아를 많이 찧는 집에서는 60㎏ 마대를 쓰지 않고 1t 마대를 써서 담는다. 지금은 3, 4가구가 자기 먹을 것을 찧을 때는 공판마대라고 자크가 달린 40㎏ 마대를 쓰기도 한다. 60㎏ 마대를 쓸 때만해도 날 새가며 방아를 찧기도 했다.

아랫선돌 방앗간을 이용하는 마을은 상입석, 재내, 하입석, 반평, 수랑, 판곡이며, 멀리 우신이나 우동에서도 이용하기도 한다. 그곳에는 정미소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네에 농사짓는 사람은 평균 5명 정도로 보면 좋을 것이다. 나머지는 임대를 준다. 임대료는 필지당(1,200평) 10가마(80㎏), 하입석 밑에는 12개, 유천은 9개 정도라는 얘기가 들리고, 남의 농사 1년 지어봐야 필지 당 70만원~100만원 정도의 이익이 생기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 현미분리기(왼쪽), 정미기(오른쪽)


요즘은 똑딱방아요

방앗간에서는 현금에 버금가는 보관증을 발급했다. 보관증은 가을에 쌀로 갚기로 하고 정미소에서 어음처럼 미리 끊어 쓰는 빚이다. 초상집에서는 노름할 때 쌀 보관증이 현금처럼 쓰였다. 선도금으로 미리 끊어가지만 가을이 되어서도 회수가 안 되면 정미소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고 이 보관증을 발행하지 않으면 고객을 빼앗기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농협의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생기면서 보관증은 생명을 다했다.
지금도 아랫선돌 방앗간은 60년대식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단지 검은 발동기가 모터로 바뀌었을 뿐이다. 정미소에는 가와줄 혹은 피대라 불리는 벨트가 어지러이 돌아간다. 정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나락을 투입구에 넣는다. 여기에 들어간 나락은 석발기(石拔機)에서 돌을 걸러내고 매에서 껍질이 벗겨지고 현미분리기와 정미기를 통과하면서 백미가 된다. 되가리, 사내, 현미라는 이름이 붙은 나무가 줄에 매달려 있는데 이 줄을 잡아당기면 아직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상태의 낟알들을 다시 매로 가서 작업을 하도록 되돌리는 것이다. 이것을 ‘끝매간다’고 한다.

농촌에서도 2, 3년 전부터는 하얀 쌀로 가져가기보다는 현미로 찧어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마도 건강을 많이 챙기면서 변한 풍속도일 것이다. 대처에 나가있는 자녀들도 현미를 요구하는 모양이다.

도정하는 품종에도 변화가 생겼다. 80년대는 통일벼가 주종을 이루었다면 90년대는 아키바레였다. 현재는 신동진이 90%인데 부안군에서 ‘천년의 솜씨’라는 브랜드로 권장하기 때문이다.
아랫선돌 방앗간에서 한 시간에 도정할 수 있는 양은 나락 80㎏ 40개, 쌀로는 20개 정도다. 하루에 80㎏ 100개에서 120개 정도는 쌀을 찧을 수 있다. 가을 참에는 일이 많아 날 새기 참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농협 RPC에서는 산물수매를 한다. 들에서 벼를 베면 생산자가 생나락으로 농협에 바로 팔아버리는 것이다. 옛날 같으면야 마당이나 도로 등에서 햇볕에 말려서 정미소에서 한꺼번에 몽땅 찧어서 팔기도 하고 식량으로도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똑딱방아’라고 하는데, 소규모로 가족이 먹을 만한 식량 정도만 찧어가는 경우다.

이제 대부분의 개인 방앗간은 ‘똑딱방아’ 수준을 면치 못한다. 이현기가 추수 후에 찧는 양은 80㎏ 3,000개 정도여서 추수 후 두 달이면 일이 뚝딱 끝난다. 잘 가면 12월 초에 일이 마무리되기도 한다. 농협 RPC가 생긴 이후 또 다른 변화는 양곡가협회 친목모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미소를 인수한 뒤 한 5년은 협회 친목모임이 유지되더니만 그마저도 중단되어 버렸다.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변하면서 정미소라고 해서 이 변화의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미소 안의 달력은 11월에 머문다


떡심은 느른하고 바람은 싸하고

아랫선돌 방앗간에 있는 큼지막한 달력은 2014년 11월에 머물러 있다. 달력에는 찧는 날짜가 빼곡히 적혀 있다. 몇 차례 갔을 때도 달력은 여전히 11월이다. 11월 지나면 쌀 방아 찧겠다고 약속하며 오는 사람이 없으니 달력을 넘길 필요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현기는 방앗간 일이 줄어들면서 기계를 사서 농사짓기에 나섰다. 현재는 35필지(남의 것 포함)를 짓고 있다.

“정미소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보지만 농사짓는 사람도 희망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외국쌀들이 밀고 들어오고, 쌀값은 자꾸 떨어지니 이 또한 ‘슬픈 일’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전에는 추수 후에 6개월 정도는 방앗간 일을 했는데, 지금은 2개월 일 하는데도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걱정이 태산이다. 자동화가 아니다 보니 쌀을 때로는 들어 날라야 하는데 부부 둘이서 하기에는 힘이 부친다.

“작년 가을에는 한 달에 300만원을 주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의지가지로 방아 일을 했는데, 올해는 작년과 상황이 또 달라졌다.”

먼지를 뒤집어 써야 하고 힘이 드니 일하려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올해라도 당장 방앗간 일을 고만두어야 할 처지다. 어쩌다 보니 건물만 멀쩡하지 속빈 강정처럼 문 닫을 날이 멀지 않음에 이현기는 씁쓸해한다. 부안말로 힘이 쏙 빠지는 ‘떡심이 느른하다’고나 할까.


▲하입석 정미소 주인(이현기 사장)

필자가 가던 날, 이현기는 논에서 트랙터로 일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고닥시 달려왔다가 얘기가 끝나자마자 트랙터를 몰고 다시 논으로 향했다. 방앗간에 덧붙인 양철판이 덜그럭거리고 큰 방앗간 건물은 도로변에 긴 그림자를 홀로 남기고 있다. 방앗간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옛 기억을 더듬는다. 서쪽으로 넘어가던 해가 마지막 빛을 방앗간 안으로 쏟아 붓고, 고부천을 거쳐 오는 싸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든다. ‘아랫선돌 방앗간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주>
1) 김형주, 『부안 땅 이름 마을이름 속의 역사문화이야기』, 부안문화재단, 2013, 280쪽.  
2) 『부안군 군세일반』, 부안군, 1933.  
3) 鎌田白堂, 『朝鮮の人物と事業』 湖南篇 第一輯, 實業之朝鮮社出版部, 1936, 166쪽.  
4) 『朝鮮の人物と事業』,  158쪽.  
5) 『朝鮮の人物と事業』, 132쪽.

/정재철(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