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재에서 본 우반동/우반동 남쪽 천마산 자락 바닷가에는 동상마을(지금의 보안면 신복리 신활마을)이 있었다.

‘동상’으로 나는 가리라
허진동과 조선의 문화공간 ‘우반동’

우반동은 비록 작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문헌에 많이 등장하고, 당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조선의 문화공간이다. 이는 동상 허진동(東湘 許震童, 1525~1610)이 이곳에 살면서 우반동을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이 소개되고, 또 많은 그의 벗들이 우반동을 드나들면서부터이다. 1560년대(추정)에 명재상이자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인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은 그의 생질이자 제자인 허진동이 사는 우반동에 들러 허진동이 지은 「우반십경(愚磻十景)」에 시를 지어 붙였다. 지재 김청(止齋 金淸, 1529~1595)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선계안에 정사암(靜思菴)을 짓고 소요했으며, 임난공신(壬亂功臣)인 나주목사 해옹 김홍원(海翁 金弘遠, 1571~1646)은 허진동의 동상정(東湘亭)에 출입하며 지은 「동상헌팔경(東湘軒八景)」이 그의 문집 『해옹집(海翁集)』에 전한다.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은 1608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김청의 정사암에 와 쉬면서 지은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가 그의 문집 『성수시화인(惺叟詩話引)』에 보인다. 그 후,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의 조부 유성민이 1612년 우반동으로 이거해 와 1636년에 김홍원에게 우반동 동변 일대를 팔았음을 우동리 「부안김씨종중고문서」(보물 제900호)를 통해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반동 일대는 유형원의 선조인 유관(柳寬, 1346~1433)의 사폐지지(賜弊之地)이다. 유형원은 32세 되던 해(1653년, 효종 4년)에 가솔들을 이끌고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는 곧 우반동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 생활에 몰두했는데, 그의 불후의 명저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은 그가 부안으로 이거해오기 전 해인 1652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670년에 완성하였다. 부안김씨들이 우반동에 집성마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675년경으로 추정된다. 김홍원이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으로부터 우반동 동변 일대를 사들인 시기는 1636년이나, 그때 바로 입촌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손자 김반(金磻)이 1675년 경 주을래리(지금의 줄포)로부터 이거하여 정착하였음을 김반의 준호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위에서 연대별로 우반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우반동을 조선의 문화공간으로서 시기를 굳이 나눈다면, 허진동이 동상정과 풍뢰당을 짓고 살았던 1610년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겠다. 이 장에서는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1610년 이전의 허진동 시대를 다뤄보고자 한다.


해서의 나그네로 지내던 날
두상에는 어느덧 흰머리 나네
바람결에 따라 노저어 돌아간다면
동상마을로 나는 가리라

위의 시는 동상 허진동(東湘 許震童, 1525~1610)이 관직생활할 때 고향인 부안의 우반동 동상마을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동상마을은 부안의 우반동(愚磻洞, 지금의 보안면 우동리) 남쪽 천마산 아래 바닷가마을, 즉 지금의 보안면 신복리 신활마을이다. 이 지역은 예전에 우반동에 속했던 지역으로 조선 선조 때에 허진동이 동상정(東湘亭)과, 그의 서재 풍뢰당(風雷堂)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땅이름이다.
변산의 남쪽 수려한 산세에 감싸인 채 마을을 이룬 우반동은 선계안 아래에서 줄포만에 이르는 너른 분지를 통틀어서 이르는 땅이름이다. 우반동 뒤(북)로는 변산의 3대봉인 덕성봉이, 동으로는 덕성봉에 이어진 삼예봉의 줄기가 내달리면서 남포리(보안면)와 경계를 이루고, 서로는 덕성봉에서 달려온 다른 줄기가 매봉과 연결되면서 진서리(진서면)와 경계를 이룬다. 남으로는 천마산이 가로 놓여 있고, 천마산과 종곡사이의 낮은 지대로는 『해옹집(海翁集)』에서 장천(長川)이라 불렀던 만화천이 줄포만으로 흐른다. 동상마을은 만화천과 줄포만이 접하는 지점의 천마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서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바로 검모포(黔毛浦)다.  
그 후, 동상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해평윤씨들이, 그 후에는 부안김씨들이 이거해와 살았으나 일제강점기와 6·25를 전후해서 시인·묵객들이 드나들던 문화공간으로서의 자취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1960년대 초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바닷가 마을의 정취마저 느낄 수 없다. 그런가하면 1950년대까지 1km 거리에 이웃한 종곡 3반으로 행정지시를 받아오다 1966년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신활마을로 승인 개칭되었다(『부안향리지』 1991년간).


▲동상마을(지금의 보안면 신복리 신활마을)/동상정은 왼쪽의 천마산 자락에 있었다.


허진동은 누구인가?

허진동은 부안의 보안면 성메(保安面 城山)에서 부친 병절교위(秉節校尉) 강(剛)과 모친 중원박씨의 9남 5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과 외삼촌인 사암 박순(思庵 朴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우계 성혼(牛溪 成渾), 옥계 노진(玉溪 盧禛), 송강 정철(松江 鄭澈), 중봉 조헌(重峯 趙憲), 금계 박동량(錦溪 朴東亮),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율곡 이이(栗谷 李珥), 매당 김점(梅塘 金坫),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죽애 서익(竹崖 徐益),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 남창 김현성(南窓 金玄成), 남교 박한유(藍橋 朴漢愈), 운강 김계(雲江 金啓), 남악 이정암(南岳 李廷馣), 오봉 김제민(鰲峯 金齊閔), 석계 박태화(石溪 朴太和), 죽곡 이응빙(竹谷 李應聘), 망암 변이중(望庵 邊以中), 도암 오희길(鞱庵 吳希吉),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지천 황정욱(芝川 黃廷彧), 죽계 김횡(竹溪 金鋐) 등 많은 학자들과 종유하면서 학문과 인격을 연마했다.
이들 중에 성혼, 노진, 윤근수, 백광훈, 서익, 이정암, 김천일, 김점, 김제민 등과는 더욱 절친했던지, 서로 만나 정을 나누고, 많은 시문을 주고받은 기록이 그의 『동상집(東湘集)』에 전한다.
그는 문과초시(文科初試))에 급제했으나 그 해 박순이 명나라 신종(神宗)의 등극하사로 중국에 가게 되자 중국을 돌아보려는 뜻이 있어 복시에 나가지 않고 백의로 수행하며 중국의 문물을 두루 살펴보고 가는 곳마다 많은 시와 「조천록(朝天錄)」을 남겼다.
그 후 대신(大臣)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수년간 수운판관(水運判官) 등의 관직생활을 하였는데, 그가 느지막에 벼슬을 한 것은 백수(白首)를 면해야 한다는 부모의 소원 때문이었다는 언급이 그의 행장에 보인다. 그러므로 복잡다단한 관직생활보다는 동상으로 돌아가 고향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이 그의 간절한 희망이고 본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허진동의 아호 ‘동상(東湘)’에 나타난 ‘湘’은 고유명사로 중국 호남성 장사현에는 소강과 상강이라는 두 개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이 두 강은 영릉군에서 합쳐져 형양을 돌아 동정호로 들어가는데 이 둘을 합쳐 소상강(瀟湘江)이라 부른다. 소상강은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중국의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했으며 특히 전국시대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이 이곳에 좌천된 후 은둔과 유배지의 상징이 되었다. 허진동은 그가 유유자적하던 줄포만을 소상강에 비유하여 ‘동쪽에 있는 湘江’이라는 뜻으로 ‘동상’이란 호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타락한 현실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줄포만은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뚫고 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바다라기보다는 한 줄기 강으로 느껴진다. 이런 줄포만을 이 지역 사람들은 ‘앞강’이라고도 부른다.
그런 그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곧 치사(致仕)하고 향리에 돌아와 우반동(동상)에 서재 풍뢰당(風雷堂)을 짓고 은거했다. 허진동은 그때의 심정을 “산 남쪽과 북쪽을 홀로 배회하니/저녁비 아침 구름에 대살문 열렸네/검포의 파도소리 울 밖에 멀고/봉래산(변산) 나무빛깔 난간 앞에 어리네/구름 보고 달 대하며 읊은 시 천 수요/한 잔 술로 흥 돋우고 근심을 푸네/애써서 다듬어도 멋진 말 안 나오니/백발로 오히려 풍뢰 소리가 듣기 부끄럽네”라고 읊었다.
허진동은 또 그가 지은 풍뢰당명(風雷堂銘)에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은 인(仁)과 의(義)이니 선을 보면 곧 실천하기를 바람처럼 빨리하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우레같이 맹렬히 하리라ˮ고 읊었는데, 청심(淸心), 과욕(寡慾), 공평(公平), 정대(正大)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허진동은 그곳에서 소요하면서 “여씨향약에 따라 인근 삼면 사람들을 규합하여 계를 만들고 지켜야 할 사항을 분명히 정립하고, 과목의 조항을 바르게 정하여 만약에 조약을 위반한 자가 있으면 자상하게 타이르고, 바로잡도록 경고하여 선에 옮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고 흥기하여 풍습이 크게 바뀌었다. 이에 사방의 이웃들이 선생이 사는 마을을 군자동(君子洞)이라 불렀다. 집 뒷산에 학당 몇 칸을 별도로 지어놓고 후학 길러내는 일을 지극한 낙으로 삼았으며 과정을 엄하게 세워 부지런히 힘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므로 모두 학당으로 모여 흥기분발하니 성공한 자가 많았다.”고 김명석(金命碩)이 지은 행장에 보인다.
고향으로 내려와 향약을 일으키고, 후학을 양성하며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는 허진동을 그의 벗들은 꽤나 부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암 박순은 “곧은 도리로 마음 삼았으니 죽어도 편안하거늘/하물며 지금 목숨 보전하고 남쪽 집으로 나아감이랴/봄나물로 자족하며 배를 채울 수 있고/돌아가 봉래산(변산) 대하여도 부끄러움 없으리”라 읊었으며, 우계 성혼은 “나도 산 속으로 가려하니/산 속에는 사신도 오지 않으리/원컨대 남쪽 고을 달을 보며/천리 밖에서 서로 그리워하세”라 읊었다.
1610년 그가 졸한 뒤 사림에서는 1652년(효종 3)에 유천서원(柳川書院, 보안면 영전리 212-3)을 입사(立祠)하고, 그를 제향하였다. 그의 유고집 『동상집(東湘集)』은 1870년에 간행되었는데 7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상집』(1870년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허진동의 문학세계

허진동이 생존하던 당시는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던 도학 중심의 유교사회였고, 그의 학문의 연원이나 교유했던 인물들이 그러한 도학자들이었으므로 허진동의 사상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학자의 여기(餘技)이고 한가로움을 보내는 수단이었겠지만 문학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타고난 소질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허진동의 동상집 내용을 보면, 권1~4에 시 564수(동상의 시작품 392수), 권5에 명(銘) 1편, 상량문 2편, 제문 2편, 권6·7은 부록으로 시 13수, 만시(挽詩) 7수, 행장 1편, 신도비문(神道碑文) 1편, 조천록(朝天錄) 1편, 일기 1편, 관참(館站) 1편, 문묘위차(文廟位次) 1편, 동행록(同行錄)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허진동의 문학의 중추는 시 부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허진동의 현존 시를 시체별(詩體別)로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絶句/五言絶句 150편(190수), 七言絶句 159편(173수), 律詩/五言律詩 62편(71수), 七言律詩 18편(21수), 古詩/七言古詩 1편(4句1수), 六言詩/1편(4句1수), 長短句/1편(4句1수)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허진동의 시 작품 392편 중 무려 389편이 금체시(今體詩)인 絶句와 律詩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 가운데는 허진동이 관직생활로 타관에서 생활하면서 귀향을 생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향수와 사향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자연의 경관과 인생의 애환을 읊은 것이 비교적 많은데, 그의 절친한 벗인 의병장 사중 김천일(士重 金千鎰, 1573~1593)이 임진왜란 때 진주싸움에서 왜의 대공세에 밀려 아들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자 “몸 던져 창의를 그대 홀로 하였으니/ 삼천 용사가 기약 없이 일어섰네/진주의 한 번 패함 끝내 뼈를 녹였으니/장한 절개 당당하게 북두성되어 올랐네”며 애통해 했다.
그런가하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바라보면서 진시황(秦始皇)이 부질없이 성을 쌓아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였음을 풍자한 「망만리성(望萬里城)」 등의 시제도 보인다. 「조천록(朝天錄)」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쓴 것으로, 노정·숙박, 궁궐의 규모, 사신의 대우, 풍습 등을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유천서원(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우반십경(愚磻十景)

허진동의 시 중에는 봉래산(변산), 마천대(의상봉), 개암동, 옹정촌, 실상사, 우반동, 검모포, 동상 등 변산을 예찬하는 시들이 많다. 그 중의 대표적인 시제는 「우반십경(愚磻十景)」으로 우반동 일대 열 곳의 경승을 시로 읊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진동의 시문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박순이 허진동의 우반십경에 부쳐 지은 시가 동상집에 전한다.

沙津賈舶 사진의 장삿배/竹嶼漁燈 죽도의 고기잡이 등불/黔毛暮角 검모 저물녘의 호각소리/水落晨鐘 수락의 새벽종/仙溪晴瀑 선계의 맑은 폭포/梨峴長松 이현의 장송/黃巖訪古 황암에서 고적을 찾다/蒼窟尋僧 창굴에서 중을 찾다/深源觀鹿 심원에서 사슴을 구경하다/神箭打魚 신전에서 물고기를 잡다

구름 끝에서 쏟아지는 듯한 선계의 맑은 폭포와 사진항(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후포)을 분주히 오가는 상고선들, 곰소 앞바다 죽도의 고기잡이 등불, 검모포진 수군들의 저물녘 호각소리, 갯골을 따라 매어놓은 어살에 가득한 고기 등, 그 당시 우반동과 줄포만의 정경이 눈에 선하게 잘 그려져 있다.
박순의 부안 방문 시기는 1561년 윤원형의 탄핵을 받아 광주로 내려가 있을 무렵으로 여겨지며 생질인 허진동이 자랑하는 우반십경에 부쳐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박순은 대제학과 좌·우의정을 두루 거치고, 선조 5년(1572)에 영의정에 올라 14년 동안 재직한 명재상이지만, 조선의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세 시인 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을 보통 삼당(三唐)으로 칭하며 이들의 시를 삼당시(三唐詩)라고 하는데, 이들 이전에 박순(朴淳)·정사룡(鄭士龍)·박은(朴誾) 등에서 이러한 경향이 대두되다가 두드러지게 일파(一派)를 형성한 것이 곧 이들 삼당으로 고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송시풍(宋詩風)을 배격하고 좀 더 낭만적이고 정서적이며 풍류스러운 당시(唐詩)를 주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 중 백광훈은 허진동과 함께 박순의 제자이고, 허진동의 절친한 벗이기도 하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도 박순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가하면 이매창의 정인이었던 유희경(劉希慶)도 박순에게서 당시를 배웠다.
박순의 시로 우반동의 아름다운 경관은 조야의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또 동상정으로 발길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를 허진동은 “늦은 봄 강가 정자에 밤은 깊어가고/달 밝은 소나무 아래 붉은 꽃 남아 있네/한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정은 끝이 없고/서울에서 내일 아침 노옹을 생각하리”라고 읊었으며, 그의 벗인 죽계(竹溪) 김횡(金鋐)은 허진동의 시 「동상정(東湘亭)」에 “동남의 인물들이 한 정자에 다 모여/취하여 상(湘)류에 나가 지는 꽃 읊었네/우습다 조물주의 진짜 희극이/다시 밝은 달로 산옹의 짝되게 하네”라고 화답하였다.
그런가하면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은 아예 우반동으로 내려 와 허진동과 이웃해 잠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정암의 “유유한 이 사람과 함께하여/우연히 같은 이웃에 붙어사니/오랫동안 마음을 알게 되었고/술마시고 노는 친구만은 아니라네...”라는 시에 허진동은 “마음은 같은데 오래 떨어져 있다가/이제 다행히 좋은 이웃으로 접했네/연기 나는 아침마다 만나 이야기하고/달뜨는 저녁이면 늘 친숙하네...”라고 화답하였다.
청하 권극중(靑霞 權克仲, 1560~1614)도 같은 시기에 “변산의 남쪽에 우반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고 찬탄했다. 권극중은 허진동의 절친한 벗인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 시기에 지재 김청(止齋 金淸, 1529~1595)은 고향으로 돌아와 선계안에 정사암(靜思菴)을 지었다. 허진동의 문집에 “선계의 아래가 우반동이니/산은 푸르고 물은 맑아 속세와 떨어졌네/오랫동안 텅 비어 사람이 없었으나/내 벗 김군이 띠집을 지었네(중략)...동상의 낚시하는 늙은이 하류에 있으니...(하략)”라는 시가 보이는데, 여기서 ‘내 벗 김군’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김청으로 추정된다. 김청은 부안의 행안 마동 출신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후 열 두 고을의 수령을 청백리로 지내고 대사간(大司諫)으로 은퇴한 후에 선계안에 별서(別墅)를 짓고 말년을 소요자적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청이 허진동의 벗일 것이라 추정하는 이유는 허진동과 동향의 연배인데다 김청이 허진동의 외삼촌이자 스승인 박순의 문집 『사암집(思庵集)』에 “찰방 김청(金淸)이 술을 들고 찾아와 고마워하다”라는 시가 보이는 것으로 보나, 허진동이 죽자 김청의 아들 김등(金登)이 그의 죽음을 애도한 시가 동상집에 보이는 것은 그들이 서로 각별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훗날, 즉 1608년에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은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 정사암에 와 쉬었는데, 그때 지은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가 그의 문집 『성수시화인(惺叟詩話引)』에 전한다.


▲허진동 묘(부안군 보안면 월천리 묵방산 태인허씨 선산)


동상헌팔경(東湘軒八景)

허진동의 종유제현(從遊諸賢)에 오른 부안의 벗들은 매당 김점, 운강 김계, 오봉 김제민, 죽계 김횡 등이다. 이들 중에 김횡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화곡 김명, 석계 최명룡 등 많은 부안사람들과 시를 주고받았음을 동상집을 통해 알 수 있다.
해옹 김홍원(海翁 金弘遠)의 이름은 동상집에 보이지 않으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동상정에 자주 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상 일대 여덟 곳의 경승을 읊은 「동상헌팔경(東湘軒八景)」이 그의 『해옹집(海翁集)』에 실려 있는데, 사포(沙津, 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후포)로 돌아가는 배, 검모포의 호각소리, 두승산의 해오름, 선운(고창 선운산)의 낙조, 십리에 걸쳐 있는 줄포만, 우반동을 흐르는 장천 등 그 당시 우반동 동상 일대의 풍경이 선하게 잘 그려져 있다.

沙浦歸舟사포귀주/黔毛吹角검모취각/斗升朝陽두승조양/禪雲落照선운낙조/十里平湖십리평호/一帶長川일대장천/後園蒼松후원창송/前階叢竹전계총죽

동상헌팔경이 어느 해에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김홍원이 젊은 시절에 동상정을 출입하며 지었을 수도 있지만, 관직생활을 마친 후 우반동 바닷가에서 소요하면서 지었을 수도 있다. 김홍원의 아호 해옹(海翁)은 주을래(줄포)가 연관지어지는 게 일반적이나 우동리 부안김씨 문중의 김종규 옹은 우반동 앞바다 동상에서 취했을 것이라며 그 근거로 김홍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말년을 주로 우반동 앞바다 동상과 검모포 등지에서 소요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의 후손들 중에 “김수종의 6촌 동생인 김수형은 배 10척을 소유하고 있었고, 노복(奴僕) 60여 호(戶)가 조선소가 있는 검모포 주위에 살고 있을 정도로 거부였다...”는 기록이 『영조무신역옥추안』에 보인다.
허진동 사후에도 동상정과 풍뢰당에서는 조선의 문화공간으로서의, 아니면 축소되었다 하더라도 부안의 문화공간으로서의 학풍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에 간행된 『부안지(扶安志)』의 풍뢰당에 대한 기록이 이를 근거한다. 그러나 동상마을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간척사업으로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바닷가 마을의 정취는 느낄 수 없고, 동상정 터, 풍뢰당 터, 허진동의 살림집 터(최동춘 댁)만이 이 마을 노옹들에 의해 가물가물 확인될 뿐이다.

참고문헌  
『동상선생문집』 허진동 원저, 유풍연 역,이회문화사
『사암 박순 시선』 허경진 역, 평민사

/허철희(부안21·부안생태문화활력소 대표)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