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원 시절의 시인 모습(1937) 이 사진은 시인의 차녀인 신란 씨가 소장해 오던 중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고향, 그리고 아버님을 그리며
[부안역사문화기행] 신석정

"나의 유년시절 아버님은 이 작은 청구원을 그처럼 아담한 동산으로 가꾸면서 주경야독으로 식견을 넓히고 시작에 정진하여 『촛불』과 『슬픈 목가』를 펴내셨다. 이 시절 아버님은 해가 설핏하면 촛불을 밝혀 놓고 밤이 이슥토록 작품을 짓고 다듬으셨다. 한 번 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두 번, 세 번 퇴고(推敲)하며 되짚어 낭송할 때 그 낮으면서도 그윽했던 아버님의 목소리는 나를 머언 꿈나라로 이끌어 주는 달콤한 자장가가 되었다.-본문 중에서"


청구원 시절

선은동(仙隱洞). 신선이 숨어 산다는 뜻의 이름만큼이나 아늑한 마을. 아버님이 손수 짓다시피 애써 마련한 삼간 초옥 청구원(靑丘園)은 마을 어귀에 자리 잡았다. 200여 평의 대지에 건평 20여 평의 이 집에서 아버님은 어머님과 함께 우리 팔남매를 낳고 기르셨다.
동진면과 경계를 이루는 작은 구릉을 배경으로 하여 올망졸망한 논밭 건너 앞으로는 상소산(上蘇山)이 우뚝해 보이는 자리. 젊어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농부이자 시인으로 삶을 일구고 가꾸시며 청구원을 수목과 화초가 가득한 꽃동산으로 꾸미셨다.
집 동쪽에는 채마밭을 만들어 채소류를 자급자족하였고 멍석 두어 개쯤 넓이의 마당 앞과 뒤뜰에는 수십여 종의 식물들을 심고 길러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정원으로 만드셨다.
시간과 거리는 사물을 아름답게 변모시킨다 하였던가? 세월로는 60여 년, 거리로는 천리에 가까운 길, 그 시절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청구원은 마치 꿈나라인양 아름답게만 그려진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온갖 빛깔의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고 과일 나무에는 먹음직한 열매가 익어 우리 형제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보수공사를 하기 전의 청구원 전경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석정 시인이 이 집을 지은 것은 1935년이다. 전주로 집을 옮기게 된 1952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며 첫시집 『촛불』과 제2시집『슬픈목가』를 탄생시켰다.


▲보수공사를 마치고 단장된 청구원의 현재 모습

이른 봄 제일 먼저 화신(花信)을 전하는 꽃은 영춘화였다. 거실이자 아버님의 서재이기도 하였던 큰방 남쪽 유리창 밖 자그마한 돌무덤 가운데 심어진 영춘화는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연황색의 가녀린 꽃을 터뜨려 청구원에 봄을 불러들였다. 더러는 늦눈발이 흩날릴 때 성급히 피어나 삭막한 정원이 생기를 띠게 만들었다.
이 꽃이 시들 때쯤엔 복수초의 짙은 황색 꽃봉우리가 수줍은 웃음을 짓고 나섰다. 아버님은 이 꽃이 겨울철 추위를 잘 견디어 내고 하루라도 빨리 꽃을 피우도록 깨진 사발 그릇을 포기 위에 덮어두곤 하였는데 개화기가 되었다 싶어 사발을 벗겨 보면 벌서 꽃망울이 터져 막 부화한 병아리와도 같은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서쪽 정원에 자리한 수선화와 생강나무, 산수유, 앞쪽 정원의 청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노랗고 하얀 꽃을 피웠고 봄이 깊어가면서는 쭉단화와 백도, 홍도, 모란꽃 등이 잇달아 피어나 화사한 꽃동산을 이루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백합과 수접화, 봉선화, 파초 등이 제철을 뽐내고 가을이면 국화와 상사꽃 등이 곱게 만발하는 가운데 수시나무의 주먹만한 감이 볼을 붉게 물들였고 늦가을엔 뒤뜰 울타리에 붙여 심은 밤나무가 잘 익은 알밤을 떨어뜨려 우리 남매들의 발길을 바쁘게 만들었다. 감나무, 밤나무만이 아니라 앞뒷뜰 곳곳에 심겨진 복숭아나무와 뽀뽀나무, 파리똥나무 대추나무 등이 계절 따라 수시로 새콤달콤한 열매를 익혀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청구원 초기에 심겨진 나무들이 나이테를 늘리면서 이내 숲을 이루자 계절마다 곤줄박이, 박새, 동박새, 비비새 등 귀여운 새들이 드나들며 더러는 둥지를 틀어 새끼를 치기도 하였다. 어느 해 늦가을에는 숲이 우거진 정원 안에 작은 개울이라도 있으리라 싶었던지 청둥오리가 짝지어 내려앉는 진풍경을 벌여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나의 유년시절 아버님은 이 작은 청구원을 그처럼 아담한 동산으로 가꾸면서 주경야독으로 식견을 넓히고 시작에 정진하여 『촛불』과 『슬픈 목가』를 펴내셨다. 이 시절 아버님은 해가 설핏하면 촛불을 밝혀 놓고 밤이 이슥토록 작품을 짓고 다듬으셨다. 한 번 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두 번, 세 번 퇴고(推敲)하며 되짚어 낭송할 때 그 낮으면서도 그윽했던 아버님의 목소리는 나를 머언 꿈나라로 이끌어 주는 달콤한 자장가가 되었다.


뒷산으로, 앞산으로

아버님은 젊어서부터 산을 좋아하여 고을 벗들과 산유회라는 동호클럽을 만들고 어울려 변산 일주를 하거나 인근 지역 명산들을 오르내리셨다. 산유회의 공용 등산구였던 광목텐트를 청구원에 두고 관리하여 봄, 가을 날씨가 화창한 주말이면 나와 누이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서해바다가 보이는 산언덕 너른 잔디밭에 텐트를 쳐놓고 머물면서 주변 풍경을 함께 내려다보거나 동시를 읽어주시곤 하였다.
어느 가을날 산행 때는 나와 단 둘이서 산마루에 앉아 서해를 바라보시다가 마치 세계지도와도 같은 문양이 박혀있는 맹감 잎을 보이시며 “저 수평선 너머 멀리에는 이 잎사귀 그림과도 같이 수많은 나라들이 있단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때 말씀을 마치시고는 고군산열도가 펼쳐진 서쪽바다를 바라보며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셔서 나로 하여금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계실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전해쯤이던 어느 봄날 아버님은 읍내 벗 몇 분과 상소산에 오르며 나를 대동하셨다. 보랏빛 고군산열도가 유난히도 가까이 보일만큼 청명했던 그날 정오 무렵 아버님과 벗님네들은 산정 서북쪽 암벽 밑에 자리 잡고 앉아 약주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셨다. 술잔을 주고받는 가운데 연신 호쾌한 웃음들을 터뜨렸는데 나는 그때 어른들이 무엇이 그다지도 즐거웠는지 까닭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아버님이 건네주어 처음 먹어본 마른 오징어 조각의 짭조름하면서도 달짝지근했던 맛은 아직도 입안에 맴도는 듯하다.


▲1933봄, 부안 성황산에서 3형제 석우 석정 석갑 그리고 신기태(사진제공:석정문학관)


딸깍발이 나막신

나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은 일본통치 말엽으로 물자가 귀하여 또래들은 거의가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돌이켜 생각하면 딸각 딸각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그 신발을 어떻게 착용하였을까 싶지만 모두가 아무 불평 없이 끌고 다녔다.
나에게는 나막신에 얽힌 사연이 많다. 그러니까 광복 다음해 2학년 겨울방학이 가까워진 섣달 초순 어느 날 수업 중에 내리기 시작한 첫눈이 하교할 무렵에는 폭설이 되어 쏟아지는 바람에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함박눈이 매서운 서북풍에 휘날리는 가운데 동중리 고갯길을 오르는데 길 위에 쌓인 눈이 나막신 八자형 굽에 들이박히는 통에 걸음을 걷지 못하고 자꾸만 넘어졌다. 선은동 청구원까지 1킬로미터쯤 남은 길을 더 헤쳐 나가지 못하고 고행을 계속할 즈음 언덕바지에 살던 상급생이 이 광경을 보고 나를 읍사무소 아래 계부님 댁으로 업어서 데려다 주어 가까스로 고생을 면하였다.
그 다음해 춘삼월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은 하서면 안서(安西) 포구 돈지마을 당숙댁의 종조부님 제삿날이어서 대소가 집안 어른들이 모두 그곳에 모이는 날이었다. 집안의 큰 제사 때면 잔치분위기가 되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기에 그날도 제사 자리에 꼭 끼고 싶었다. 셋째 수업이 끝나고 나서 담임선생님께 사유를 말씀드리고 조퇴를 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선선히 허락해주시어 얼씨구나 들뜬 마음으로 교문을 나섰다. 물론 나막신 차림으로……
서외리를 지나 행안면 벌판 신작로를 걸어가던 참에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가던 중년쯤의 아주머니 두 분에게 초행임을 밝히고 길을 묻자 행선지가 같다며 “함께 가자”는 응답이었다. 그분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 그때 지명으로 ‘큰다리’로 불리던 갑문교를 지날 때쯤에는 발가락이 부르트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걸음이 자꾸만 쳐지고 터덕거리면서 걷다 서다를 반복하여 읍에서 십여 킬로미터 거리의 돈지마을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다. 그날 새벽 일찍 전날 채취한 굴을 읍내 장에 내다 팔고 돌아가던 이 아주머니들이 철부지 소년 길안내를 하느라 큰 고생을 하였던 것이다.
가까스로 당숙댁 마당에 들어서자 종항간 형제분들과 마악 저녁을 들고 있던 아버님이 깜짝 놀라시며 내려와 나의 손목을 잡고 반겨주셨다. 아버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시자 나는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아 한참 훗날까지 집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내 추스르고 저녁을 먹고 난 나를 데리고 아버님은 포구 앞 해변으로 나아가 산책길을 이끌며 “머언 길을 어렵게나마 찾아온 것은 잘 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보인 것은 사내답지 못했다.”고 한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사나이가 눈물을 흘려도 좋은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나라가 망했을 때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친한 벗이 죽었을 때”라고 가르쳐 주셨다.
저녁 조수가 잔잔하게 포구 모래사장에 철석이던 그날 밤의 바닷가 풍경과 아버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내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1973년 3월, 전주 남노송동 비사벌초사에서 부인 박소정 여사와(사진제공:석정문학관)

청구원을 찾은 이들

청구원에는 아버님이 귀빈이라고 일컬었던 조부(필자의 증조부) 제열(濟烈) 님을 비롯하여 가까이 지내시던 고을 벗들, 그리고 많은 문인들이 찾아왔다.
도보로 수삼분 거리의 종가집에 사셨던 증조부님은 청구원 서재에 자신의 목침 베게까지 갖다놓고 자주 방문하시면서 서가에 꽃혀 있는 중국 시집을 골라 낮은 음성으로 한시들을 낭송하시다가 곧잘 오수를 즐기셨다고 한다. 아버님의 회고에 따르면 청구원 앞뜰에 백합꽃이 한창이던 어느 초 여름날 저녁 무렵,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서재 탁자 위 화병에 꽂아놓은 백합꽃을 보셨던 증조부님이 ‘병 속의 꽃을 보고 읊는다’는 제목으로 칠언절구 한시를 써놓고 가신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이러한 사연을 ‘화병(花甁)과 새와 노시인(老詩人)’(수상집 「난초(蘭草)잎에 어둠이 내리면」, 25쪽) 제하의 수필에 담아 남기셨다.


▲1935년 봄 청구원에서 석정, 김태종, (미상), 신기태(왼쪽 사진)(사진제공:석정문학관)


▲1972년 죽마고우 박기환 시조시인과 부안 성황산에서 고군산열도를 가리키며(사진제공:석정문학관)

필자의 유년시절 가장 반가웠던 손님은 전주에 살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번갈아가며 과자와 장난감 등을 한아름씩 안고 오셨던 김대규 님과 김세웅 님이었다. 아버님보다 7~8세 연하였던 두 분 문인은 우리 형제들을 친조카만큼이나 따뜻하게 대해주어 우리는 모두 두 분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대규 님은 토목기술자였고, 세웅 님은 의사였는데 모두가 마흔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 아버님은 두고두고 이들의 단명을 안타까워 하셨다.
중앙 문단에서도 여러 분들이 청구원을 찾았다. 황해도 배천온천집 자제로 아버님의 7년 연하인 장만영 시인은 경성 제2고보 재학 중이던 중학생 때부터 여러 차례 오가던 끝에 아버님의 처제 박영규 님을 배필로 삼아 동서지간이 되었다.
미당 서정주 님도 중학생 시절에 청구원을 처음 방문했는데 마을 어귀에 있는 청구원에 들어와 마침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밭일을 하던 아버님께 “신석정씨 댁이 어디냐?”고 물어 “여기요”라고 대답하자 못내 미심쩍어하며 한참을 두리번거렸다고 한다. 아버님은 이 날의 상면을 기쁘게 여겨 뒷날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서울에 유학 중이던 미당에게 보내주셨다.
중앙불교전문강원을 수료하고 귀향했던 해, 가람 이병기 님이 청구원을 찾았다. 가람과는 이때 처음 맺은 교분이 전주 시절로까지 이어졌는데 아버님은 그분을 대선배로 깍듯이 모셨고, 50년대 후반 몇 해 동안에는 전북대 강단에 함께 서시며 친교를 더욱 두터이 하셨다. 그리고 또 한 분, 그 해에 청구원을 찾은 큰 시인은 조운(曺雲) 님이다.


▲석정 시인이 직접 써서 거실에 걸어두었던 조운 님의 시조 「구룡폭포」(사진제공:석정문학관)

예서 부안이 북으로 백오십리
모르던 옛날에는 천오백리만 여겼더니
이제는 시오리 남짓 되나마나 합니다.

내 고장 산과 들이 부안만이야 하리마는
해불암 하루저녁 쉬어 감직한 곳이니
신나무 제철이 되거든 한번 찾아주소서.

위는 조운 님이 청구원을 방문해 아버님과 만남으로써 이전에는 천리길 만큼 멀리 느껴지던 그분의 고향 영광과 부안의 거리가 시오리만큼이나 가까이 느껴진다는 소회를 담은 시조다.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江)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崖)에
한번 굴러보느냐.

아버님은 조운 님을 시조시인으로 가람과 쌍벽을 이룬 분이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그분의 대표작인 위 「구룡폭포(九龍瀑布)」를 서폭에 담아 세상을 뜰 때까지 비사벌 초사 거실에 걸어두셨다.
고을 벗으로는 첫시집 「촛불」에 서문을 얹은 김태종 님, 족숙 신기태 님, 족제 신영훈 님, 김원규 님 등이 청구원을 자주 찾았다. 비록 시골에 살았지만 도회사람 못지않게 말끔한 외양과 교양을 갖추었던 이분들이 청구원에 모이면 앞뜰 은행나무 아래 자리를 펴고 담소를 나누다가 해질녘이면 거실로 자리를 옮겨 밤늦도록 약주를 나누곤 하였다.


▲석정시비


▲부안군 행안면 서옥마을 고성산에 자리한 석정 시인의 묘소


석정문학관에는...

두 해 전, 청구원 길 건너에 아버님을 기리는 문학관이 세워져 가까이는 물론 경향 각지에서 많은 방문객이 찾아오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기쁜 일이다. 우리 유족들은 군 등 관계당국과 고을 모든 분들이 힘을 모으고 정성을 더해 규모 있고 충실한 자료를 갖춘 문학관을 조성해주신 것을 감사해 마지않고 있다.
문학관에는 아버님이 떠나신 뒤 우리 형제들이 보관하고 있던 모든 유품이 출품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3,000여 권의 도서는 젊어서부터 평생 동안 사들여 읽으시며 무엇보다 아끼던 자산이었다. 어렸을 적 한문공부와 초등학교 교육 외에는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의 1년 수강이 학력의 전부였으면서도 이들 서책을 통해 넓힌 식견이 동서고금의 모든 문예와 사조를 꿰뚫어 어느 자리에서든지 막힘이 없으셨다. 결혼 초에 어느 해인지 꼭 사야할 책이 있었으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어머님의 결혼반지를 팔아 가까스로 뜻을 이루신 사연은 청구원 시절의 애절한 에피소드의 하나가 되었다.


▲자녀들에게 쓴 편지(사진제공:석정문학관)


▲석정문학관

이처럼 힘들여 사들인 자산이었기에 아버님은 서책들을 귀하게 다루셨고 일부 값비싼 책자는 창문이 있는 서가에 따로 소장하기도 하셨다. 이들 서책들이 모두 문학관으로 옮겨져 잘 보존되고 또 전시되어 방문객들에게 아버님의 시 세계를 엿보게 하고 아버님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는 것을 우리 유족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문학관에는 또 아버님이 평생 동안 받아 알뜰히 보관하였던 서찰들도 옮겨져 있다. 성품이 아주 꼼꼼한 편이셔서 젊을 적 청구원 시절부터 전주에 기거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문단 인사들과 친지, 제자, 떨어져 살던 우리 형제들에게서 받은 모든 편지와 언론사 월간지 등에서 보내온 원고청탁서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채곡채곡 쌓아 보관하셨는데 상자 수가 여섯 개를 헤아렸다. 이밖에도 문학관 회랑에 자리한 아버님의 유영(遺影)들과 기거하시던 방처럼 꾸며놓은 일층 전시실의 문방구 유품들이 그곳을 찾을 때마다 우리 형제들에게 애틋한 사부(思父)의 정을 자아내게 한다.
아버님과 우리 형제의 산책 코스였던 소나무 밭 터에 문학관이 세워진 지도 어느덧 삼년 째. 가을에는 또 그 개관을 기념하는 문학제가 다양하게 펼쳐진다는 소식이다. 벌써부터 그날이 기다려진다. 가서 고마우신 분들도 만나 뵙고, 고성산 공원에 성묘도 가야겠지……

/신광연(신석정 시인의 3남, 전 동아일보 기자)

'부안이야기 10호'에서 옮겨왔습니다.

< 부안 21 >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