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물길이 막히기 전 계화도갯벌에서 ‘그레질’로 백합을 잡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삶의 위기"
[고길섶의 부안여지도]인문학의 발견과 ‘부안학’ 생각-2


인문학의 위기는 삶의 위기

부안의 역사인물들은 부안 인문학의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으나 그 전부일 수는 없다. 부안의 역사와 사건들 역시 인문학적 지평을 여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가까이는 10년 전의 부안항쟁 즉 핵폐기장 반대투쟁이 있다. 핵발전의 확대라는 국가정책에 반대를 하는 지역주민들의 싸움이었지만, 반핵투쟁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세계의 창이었고, 이 싸움과정과 그 의미들을 통해 우리는 풍부한 인문학적 질문들을 사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군민들이 광범하게 참여한 촛불집회 강연주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된 강사와 주제들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다. 강사의 소속이나 직함은 당시의 것이다.

최열(환경운동연합) : 핵폐기장 문제
이필렬(방송대 교수) : 대안에너지 문제
이상훈(에너지대안센터) : 에너지 대안 문제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 백기완의 이야기 마당
박홍규(영남대 교수) : 지역주민들의 저항인권과 공권력의 인권유린
권영길(민주노동당 대표) : 주민운동과 새로운 정치
원용진(서강대 교수) : 촛불시위의 문화
이강실(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 여성의 힘으로 세상 만들기
홍성태(상지대 교수) : 핵발전 정책과 위험사회
김동민(한일장신대 교수) : 지역언론의 문제
전규찬(강원대 교수) : 언론의 부안보도 문제
장하순(순천향대 교수) : 지역신문과 지역사회
조경만(목포대 교수) : 변산반도 일대의 생태인류학적 시각
최혁(사회당) : 반전평화와 부안의 반핵운동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 민주주의와 시민참여 의식
황평우(한국문화유산정책소장) : 위도의 천연자원 및 문화재 보존
전고필(동강대 겸임교수) : 관광부안의 올바른 길
조정환(정치연구가) : 지역주민 공동체의 자율적 구성
지병문(광주전남개혁연대) : 지방자치 민주주의
손미아(강원대 교수) : 핵산업과 건강 문제
오관영(함께하는시민행동) : 지자체와 예산감시운동
서관모(충북대 교수) : 노무현 정권의 성격과 부안사태
박준성 : 동학혁명과 부안항쟁



▲부안핵폐기장 철회 촉구 촛불집회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으로 호소하게 된 배경은 아무래도 인문학의 위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인문학 위기는 1990년대 후반 들어 가시화되었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탐구하는 영역인데, 시장의 논리에 따른 대학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철학과 등 기초 인문학과들이 폐지되거나 통폐합되고 학부제로 전환되면서 설자리를 잃어왔다. 마찬가지 논리로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보다도 먹고 살기 다급해지는 학생들의 실용적 선택에서 기초 인문학과들이나 기초 인문강좌들은 폐지, 폐강되기 일쑤였다. 1997년 어느 대학의 경우 17개학과를 통합하여 인문사회학부를 만들었는데, 3학년 올라가면서 전공별로 지원한 결과 철학과 1명, 사학과 2명이라는 충격적인 사례가 나올 정도였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돈의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해진 것이다. 인간의 현상, 인간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탐구의 창의적 열정이 돈과 시장의 논리로 왜곡, 착취당함으로써 인문학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부안항쟁을 불러일으킨 위도 사람들의 핵폐기장 유치 추진도 알고 보면 사회총체적으로 볼 때 인문학의 위기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의 삶에 대해 인문학의 이름으로 명명하든 안하든 내용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본래 인문학적이다. 인간으로서의 살아가는 길을 묻는다면 말이다. 이 인문학적 질문을 멈추게 되고 사회 분위기가 그런 풍조로 휩쓸리게 되면 인문학의 위기는 온다. 이미 당시에 고창 등 다른 지역에서도 반대를 했기 때문에 위도 사람들이 핵산업자본과 국가권력의 생명-환경의 착취, 지역적 삶의 공간-문화지리적 착취, 주민들간 적대적 분열의 착취, 위험사회 증폭 및 미래세계에 대한 불안감 조성의 착취 등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상금이라는 돈과의 거래를 수용한 것은 인간의 삶의 가치와 방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멈추게 한 인문학적 위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 결국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제도권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총체적 과정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실상 인문학의 위기는 삶의 위기를 표현한다. 부안사태로 인해 부안이 위기에 처해졌을 때 이를 이겨낸 동력을, 위도-핵폐기장 유치라는 단순한 사건에 불과해보이는 것을 군민들이 다각적인 인문학적 시각으로 들여다본 학습효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문학적 사유와 자연생태학적 사유의 융합

인문학의 위기가 삶의 위기를 표현한다면 거꾸로 삶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그 하나의 방법으로서 인문학적 질문을 통해 해결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 강좌 류의 명칭이 바람을 탄 것이나 삶의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 접근법이 요구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적 질문을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고 해서 인간 중심의 사유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퇴행하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삶의 위기는 사실 인문학의 부흥으로 극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삶의 위기는 자연(과학)의 문제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적 인문학은 인간 중심의 사유였으며,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지배대상이라는 인식틀에 갇혀 있었고 삶의 위기로 몰아넣는 자연생태의 파괴라는 위험사회적 요소들을 가중시키는 데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사유와 더불어 자연생태학적 사유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영역은 융합되어야 한다.


▲채석강

부안에서의 인문학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생태적 사유도 고려해야 하며 그것이 곧 부안 인문학을 넘어 부안학으로 진화되어야 할 까닭이다. 새만금사업은 그 대표적인 반증사례라 할 수 있다. 새만금 해안지역은 어촌의 인문학적 지표들이 있었고 계화도의 경우 그레문화라는 문화인류학적 상징들이 엄연히 존재했고 거기에 우리는 자연생태학이라는 또다른 범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새만금 바다, 해양, 해산물, 갯벌, 생명체 등의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문화인류학적 가치들보다 더 소중하고 근원적인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부안은 해양과 해안을 포함해 변산반도 국립공원이라는 지형적, 지리적, 공간적 천혜의 자연자산을 가졌는데, 이것들은 모두 볼거리로서만이 아니라 부안학의 자연적 탐구물의 대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격포리퇴적층의 경우 지질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퇴적층의 교과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자연관광 자산으로서 더 깊어지기 위해서라도 자연사적, 지질학적 탐구에 시간여행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면 내실있는 문화콘텐츠로 접근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직접 지질학적 연구를 하거나 그럴 능력은 없다. 그러나 지질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지역학적 지식담론의 의미체계로 재구성된다면 그것이 바로 부안학의 사유대상으로 설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안의 자연생태 영역 대부분은 국립공원적 입장에서 관리되고 있을 뿐이지 부안의 지역적 유산으로서의 생산성은 부재하다고 볼 수 있다. 부안군 면적이 493.35㎢이고 그중 국립공원 면적이 153.934㎢나 되는데도 말이다.

지금-여기의 인문학

부안에 관한 연구를 부안학이라고 할 때 그 탐구대상은 앞에서 거론된 것들 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를 크게 역사, 문화, 언어, 문학, 환경, 자연생태, 지리, 관광, 문화유산, 사상, 생활방식, 정치, 인물, 경제, 일상, 종교 등으로 고려해볼 수 있으며, 그러나 이것들을 단순 나열하는 것이 부안학의 궁극목표라고 할 수는 없다. 역동적이며 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인문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지역학적 콘텐츠의 생산을 풍부히 하면서 새롭게 해석하며 부안의 정체성을 탐구, 제시하는 노력으로서의 부안학의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부안에서 인문학을 이야기한다면,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그 지혜들을 빌어오되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꼴을 들여다보는 인문학, 즉 부안학의 좌표로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끝>

/고길섶_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