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유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부안21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2013 얼아로미-문화답사보고서-9]반계 유형원과 부안


부안여고 문화답사동아리 ‘얼아로미’는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체험적 학습과 탐구, 향토문화 조사와 보존 등을 주요 활동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전국을 무대로 매년 정기답사 활동을 꾸준히 추진하는가 하면, 해마다 향토문화와 관련된 특별 주제를 하나씩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그것을 문화답사보고서로 발간하고 있다. 부안21은 부안여고 ‘얼아로미’의 허락을 얻어 2013년 2월 15일 펴낸 <얼아로미-문화답사보고서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을 여러 회로 나누어 게재한다.<부안21> 

반계 유형원과 부안

반계는 나이 32세 되던 1653년(효종4) 겨울에 부안현 남쪽 기슭 우반동(愚潘洞)으로 이거하였다. 이곳에는 세종 때의 우의정이자 청백리로 선정된 8대조 유관(柳寬)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파묻혀 만 권이 넘는 장서를 탐독하며 바람직한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또 몸소 연구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였다. 조선의 실학이 특히 이곳 전라도에서 싹트게 된 것도 바로 반계가 이곳에서 많은 후진과 주민 등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부안의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전쟁이나 하늘의 재앙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변산의 산자락을 따라 널따란 평야가 펼쳐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이다. 선생은 이곳의 지명을 따 자신의 아호를 ‘반계’라 하였다. 

소란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산이 아름답고 강이 푸른 우반동. 거기에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기에,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선생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시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우반동은 바닷가에 연하여 있으면서 숲과 골짜기의 경치가 뛰어났다.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초가집을 짓고, 세상의 일은 사절하여 문을 닫아걸고 책을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선생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여 밤낮을 잊었다. 마음에 묘하게 부합되는 것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반드시 일어나 그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매일 해가 질 때는 반드시 “오늘도 헛되게 보냈구나.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유한하니 옛사람은 무슨 정력으로 저렇게 성취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매일 먼동이 틀 때 깨끗이 씻고 의관을 바로하고 가묘를 배알하였다. 물러나 서실에 앉으니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다. 대나무 사립문은 항상 닫혀 있고 사슴들이 낮에도 다녔다. 선생은 그런 것을 돌보고 즐기며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요한 후에 능히 편안할 수 있고, 능히 생각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 말이 참 훌륭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우반동에 머물면서 농민을 직접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항상 큰 배 4, 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매번 달밤에는 한음(漢音)으로 거문고를 잡고 연주하니 소리가 아름다웠다. 집에서는 준마를 길렀고, 좋은 활과 조총 수십 자루를 마련하여 집안의 노복과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한가로운 날 그것을 연습하며 묘수(妙手)를 찾았다.

선생은 스스로 아껴 쓰고, 또 소와 말을 팔아 오곡을 사두었다. 선생은 먹어도 두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고, 남은 곡식을 힘써 보존해서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떠돌이 거지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해 대접하고 구제했다. 

우반동에 들어와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며 학문에 몰두한 지 어언 20년. 현종 8년(1673), 선생 52세 되던 해 3월 19일 인(寅) 시, 선생은 우반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다. 2월부터 병이 들어 낫지 않고 한 달여를 고생하다가 마침내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다음날 새벽에 운명하였다. 선생이 별세하자 곡(哭)에 모여든 자가 천여 명이었다.                                 
일생 산수를 즐기며, 학문을 좋아하며, 나라의 융성을 그리며, 그 구상을 저술에 담는 일에 몰두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는 덕행(德行)의 삶을 살던 반계는 이렇게 역사의 품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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