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창제례'는 배꽃이 흩날릴 무렵 부안 매창공원 이매창 묘에서 올려진다.ⓒ부안21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부안역사문화기행] 허균2-'계랑의 죽음을 슬퍼하다'


1608년 8월 공주목사직에서 파직 당한 허균은 예전부터 은둔하려고 눈여겨 보아두었던 부안 우반동 정사암에 와서 쉬게 된다. 이매창이 사는 곳이었기에 그런 결심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매창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재회 후 이들의 사귐은 더욱 깊어져 갔고, 그때 이미 병들어 있던 매창은 허균의 영향으로 참선을 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러나, 허균의 부안에 오래 머무르려했던 계획은 그해 12월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됨에 따라 무산되고 만다. 그 다음해(1609년) 2월 초하루에 유태감(劉太監)을 접대하기 위해 원접사(遠接使) 이공 상의(李公商毅)가 종사관(從事官)으로 허균을 천거해 2월 15일 이공을 따라 한양을 나섰다.

그런 와중에 매창과의 사이에 뜬소문이 돌아 허균은 곤란을 겪는다. 사연인즉, 전임 수령이 떠난 뒤에 부안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매창이 달밤에 그 비석 앞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하는 것을 허균의 친구인 이원형(李元亨)이 지나다가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一曲瑤琴怨鷓鴣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亦有佳人墮淚無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를 절창이라 하며 허균과 매창의 염문을 키워갔다. 그때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를 넌지시 꾸짖었다.

계랑(桂娘)에게  

아가씨는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山鷓鴣)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參禪)을 하는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기유년(1609) 1월
/성소부부고 제21권  

‘산자고’는 옛날 중국 민간에 불리어지던 악부시다. 자고鷓鴣새는 뜸부기이다. 중국사람들은 뜸부기가 뜸북 뚬북 우는 소리를 ‘행부득行不得 행부득’으로 들었다. 그래서 그리움을 나타내는 새를 자고새로 표현한 것이다.

허균은 뜬소문으로 한때 당황하기는 했으나 매창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간 듯하다. 그러나 그해(1609년 6월)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1609년 9월)에 제수되는 등 공무가 바빠 부안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한다. 매창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에 허균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 송(宋)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기유년(1609) 9월
/성소부부고 제21권

부안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허균의 약속은 한 해를 또 넘긴다. 그러던 중 1610년 어느 여름 날,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는 시 두 편을 지어 슬픔을 달랜다.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竊藥去人群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려/ 香殘翡翠裙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明年小桃發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誰過薜濤墳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 凄絶班姬扇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悲涼卓女琴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 飄花空積恨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衰蕙只傷心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蓬島雲無迹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 滄溟月已沈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他年蘇小宅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 殘柳不成陰
/성소부부고 제2권

허균은 매창이 죽은 그해(1610년) 10월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취소되고, 11월 1일 별시문과 대독관이 임명되었으나 조카들을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12월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다. 이때(1611년 4월 23일)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지금은 26권만 전해 짐)을 완성했다. 1611년 11월에 귀양에서 풀린 허균은 그때서야 부안으로 다시 내려왔다. 매창이 없는 부안은 허전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1612년 8월에는 맏형인 허성마저 죽고, 가장 가까운 벗 권필이 왕(광해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매맞아 죽었다. 12월에 진주사가 되었지만 이틀 만에 갈린다. <홍길동전>은 이해에 지은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613년에는 호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무렵, 조선은 정치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선조가 죽고(1608년) 광해군에게로 권력이 이동하던 시기이다, 이해에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등 일곱 서얼의 옥사(칠서七庶의 옥獄)’가 일어나 ‘계축화옥(癸丑禍獄)’으로 확대되었고, 영창대군이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1614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은 선조에 이어 광해군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은 듯하다. 그 많은 탄핵상소에도 불구하고 그의 벼슬길은 근근이 이어진다. ‘칠서의 옥’이 있었던 1613년 12월에 예조참의가 되었지만 이틀 만에 갈리고, 1614년 2월에는 호조참의가 되었고, 여름에는 천추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1615년에는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으며, 5월에는 문신 정시에서 일등을 하여 동부승지가 되었고, 6월에는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1616년 5월에는 정2품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0월에 파직되었다.

1617년 허균의 앞길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1월 14일 당시 유행하던 흉서들이 허균의 사주로 이재영이 썼다는 민인길의 비밀상소가 임금에게 접수되었다. 이 일로 영의정 기자헌이 사임을 청했다. 허균과 이재영은 서로 모르는 일이라 부인했다. 2월에 정2품 좌참찬이 되었다가 3월에 다시 형조판서로 복귀했다. 11월에는 대비에 대한 폐출 상소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폐모에 반대하는 기자헌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접수되자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이 아버지(기자헌)를 살리기 위해 허균이 오랫동안 역모를 준비했다고 비밀 상소를 올렸다.

1918년, 허균은 이를 변명하는 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그때마다 기준격은 내용을 추가해 올렸다. 급기야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동으로 계를 올려 허균이 역적으로 몰렸다. 허균이 옥에 갇히게 되자 심복들이 허균을 탈옥시키려고 감옥에 돌을 던지며 시위했다. 광해군은 친히 심복들을 국문하기에 이르렀다. 허균의 벼슬길 동기인 이이첨은 망설이는 광해군을 협박하여 허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8월24일, 허균은 결안(結案)도 없이 그의 심복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허철희/huh@buan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