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의 상징, 울금바위(우금암)


"굴 앞에는 자그마한 절이..."
[부안역사문화기행]표암 강세황의 '유우금암기'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

부안현의 서문을 나와 서쪽으로 십여 리를 가면 돌밭이 아득히 뻗쳐있고, 왼쪽으로 먼 산이 하늘가에 보일락 말락 하는데 이곳이 고부, 정읍 등지이며, 오른쪽으로 이은 봉우리가 끊임없이 서려 있어 그 형세가 웅대하고 수려하니 이게 변산이다. 산의 동쪽자락에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이 있고, 또 얼마를 가면 들 가운데 평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나 있는데 이곳에 유천서원柳川書院(이 지점이라면 개암사 입구 청등마을에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인듯하다. 유천서원은 개암사로 가는 길에서 한참 남쪽으로 지금의 영전에 있다.)이 있다. 또 거기서 십여 리를 가면 오른쪽으로 변산의 입구를 들어가는데 얼마동안 꺾어 들어가면 솔밭사이에 큰 가람이 있는데 이것이 개암사다. 절에 들어가 우러러 쳐다보니 절 뒤엔 만장萬丈의 높은 봉우리가 하늘의 구름을 꿰뚫고 서 있고, 봉우리 위엔 바위 셋이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백여 장이나 되어 보였다. 가마를 타고 올라가니 바위 밑에는 굴이 있는데 크기가 백 칸 집 같았고, 길이도 수십 장쯤 되는데 벽 무늬가 가로 세로로 되어 마치 무늬 있는 비단 같았다. 이것을 우진굴禹陳窟 또는 우금굴禹金窟이라 하는데 굴 앞에는 자그마한 절이 있어 옥천암玉泉庵이라 편액했다. 거기서 굴을 돌아 오른쪽 재를 넘어서 수리를 가니 비로소 평탄한 길이 나선다. 좌우의 기봉奇峰은 응접할 틈이 없고, 맑은 물과 층암절벽은 인간세상이 아닌 듯했다. 때는 봄이건만 아직도 남아있는 잔설이 어긋어긋 깊은 숲속 그윽한 시냇물 속에 서로 비치었다. 실상사에 도착하니 절은 매우 웅장했으나 지금은 많이 헐었다. 스님이 고물을 내보이는데 오동향로烏銅香爐, 오동구학烏銅龜鶴, 오동양지병烏銅楊枝甁이었다. 그 제작이 또한 모두 기이하고 정교했다. 여기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다가 월명암이 좋다는 말을 듣고 가마를 재촉해 타고 절 뒤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봉우리 모습은 벽처럼 서 있고, 돌길은 실낱같이 발 붙일 수가 없었다. 급경사를 오르기 한 오리쯤에 절정에 이르러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돛단배가 왕래하고, 작은 섬이 하나 보이는데 여기가 흥덕興德 땅이라고 한다. 북으로 꺾어 산허리를 타고 가니 녹다 남은 눈이 아직도 깊이 쌓여 정강이가 묻혔고, 그 곁으로 난 길은 매우 위태로워 천 길 낭떠러지 벼랑이어서 만약 한 발만 헛디디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월명암에 도착하니 지세는 가장 높아 큰 산을 굽어볼 수 있으나 물결치고, 구름도 끼었기에 똑똑히 다 볼 수는 없어 가던 길을 바로 되돌아와 실상사의 오른쪽으로 돌아 용추龍湫로 향했다. 돌길이 위태로워 월명암 가는 길보다 더욱 심하여 가마는 탈 수 없어 지팡이를 짚고 기어올라 두어 고개를 넘으니 나는 폭포가 두 벼랑사이에 쏟아지고 구슬이 튀어 그 형세가 매우 기장奇壯하고 바람소리 부딪쳐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숲이며 온 골을 울리고 있었다. 폭포를 따라 오르고 또 올라 산꼭대기에서 바다를 굽어보았고, 꺾어서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또 꺾어 북쪽으로 가니, 그러니까 월명암으로부터 이십여 리를 가서야 내소사에 도착하였다. 절 뒤의 봉우리는 곧 실상사의 안산案山 밖이었다. 절은 화재를 만나 중건되었는데 비록 장려壯麗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자못 정신整新하여 아직 모두 단청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점심을 지어 먹고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고서 산 어귀로 나와 북쪽으로 가니 개암동구길이 다시 나선다. 해가 겨우 져서야 돌아왔다.

위의 글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그의 아들 강흔姜俒(봉정대부奉正大夫, 정4품)이 부안현감(1770~1772년)으로 있을 때 직접 변산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이 글은 표암유고豹菴遺稿에 전해지며, 표암유고에는 유격포기(遊格浦記)가 더 전해지고 있다.


표암이 70세에 그린 자화상/비단에 채색, 88.7cmx51.0cm, 강영선 소장

그렇다면 표암 강세황은 누구인가.

조선의 문예 부흥기였던 영, 정조대를 풍미한 문인화가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스승이다. 그는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로서 시詩, 서書, 화畵, 악樂에 고루 뛰어났으며 다양한 소재를 다룬 그림과 화평(畵評)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림藝林의 총수’로 인정받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산수화에 서양화법을 도입하였으며, 자화상을 비롯한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을 뿐 만 아니라, 서화에 대한 해박한 이론과 뛰어난 감식안을 갖춘 당대 최고의 서화 평론가였다.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광지이며, 호는 첨재, 산향재, 박암, 의산자, 견암, 표암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는데 이중에 대표격인 표암은 어려서 자신의 등에 있는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여 스스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서울 남산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우참찬·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아버지 역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나 청백리에 녹선된 가난한 집안이었다.

표암은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8세에 시를 짓고, 13~14세 때 그가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21세 때 진천에 머물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 상을 지내고, 곧 이어(25세 때) 어머니가 별세하자 다시 시묘살이를 했다. 벼슬이 없었던 강세황은 집안이 옹색해지자 처가인 안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그의 나이 32세 때의 일이다.

단원 김홍도와 표암 강세황의 만남은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단원은 아주 어려서부터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는데, 표암은 이때를 ‘단원기檀園記’에 “단원은 어렸을 적부터 나의 집에 다녔다.”고 하였고, 또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에 드나들었다.”고도 하였다. 표암의 절륜한 안목은 단원의 천재성을 간파하였고, 단원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대화가가 되었다. 단원은 스승에게서 그림만 배운 게 아니었다. 뛰어난 문인화가였고, 또 최고의 미술평론가로 당시 예림의 총수로 불리었던 스승으로부터 다방면에 걸쳐 많은 것을 배웠다. 스승의 재기 발랄한 익살까지도 영향을 받아 풍속화 등에서 그 해학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표암은 그런 제자에게 당대 제일의 평론가로서의 무게를 실은 평론을 통해 그 화명(畵名)을 한껏 높여 주었다. ‘단원기’에 “화가는 각각 한 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홍도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또, ‘단원기 또 한 본“에서는 ”우리나라 4백년 역사상 파천황破天荒적 솜씨“라고 극찬하였다.


송하맹호도/비단에 채색, 90.4cm x 43.8cm, 호암미술관 소장/표암이 소나무를 그리고, 단원이 호랑이를 그린 사제간의 합작품

이러한 표암과 단원의 관계는 우리 예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겨준 사제관계의 귀감이라 하겠다. 전문가들이 세계 최고의 호랑이 그림이라고 하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김홍도의 동물화 중 가장 걸작품으로 스승인 강세황이 간일(簡逸)한 필치의 문인화풍으로 소나무를 그리고(우측 상단 낙관은 표암화송(豹菴畵松)이다) 김홍도가 극사실주의의 화원화(畵院畵)풍으로 호랑이를 그린(좌측하단낙관의 사능(士能)은 김홍도의 자(字)이다) 합작품이다.  

표암은 51세 되던 해(1763)에 갑자기 절필을 하기도 했다. 둘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여 영조를 만났을 때 영조가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강세황은 화필을 태워 버리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런 그는 창작 대신 평론가로서 활동하였다. 그 기간에 표암은 영조의 배려로 61세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영릉참봉·사포별제·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다시 화필을 잡은 것은 70세 전후의 일이다. 71세 때는 할아버지 강백년, 아버지 강현에 이어 기로소에 들어감으로써 이른바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칭송받았다. 이듬해 북경을 다녀왔으며,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화 등을 남겼다. 그의 변산 여행은 이보다 앞선 57~59(1770년~1772년)세 때 일이니 그 때가 바로 그의 절필 기간이다. 절필 기간이 아니었더라면 혹 변산의 실경사생화 한 폭이라도 전해지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내소사지, 화인열전, 경기헤럴드, 경기일보, 표암 강세황 산문전집(박동욱, 서신혜 역주-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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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철희/huh@buan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