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03-09 (21:33)
까치똥섬에서 작당까지 진서의 해안선을 걷다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4161

 

까치똥섬 암석섬이지만 상층부 지표면에는 황토로 이루어져 소나무들이 크게 자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섬을 ‘까치똥섬’이라 부른다

 

 

 

배신감 느낄 바다를 보며
까치똥섬에서 작당까지 진서의 해안선을 걷다

 

배신감 느낄 바다를 보며

변산반도 해안선 탐사를 해보면서 결론내린 생각은, 바다(해안)는 자연 그대로 사용되거나, 개발하며 사용되거나, 방치되거나, 또는 폐 공간으로 버려지는 4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방치는 사용을 안 할 뿐이지 바다로서 살아 있다. 그러나 사용을 했든 안했든 간에 버려진다는 것은 용도 폐기된다는 것으로서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심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작도 해안은 높지 않은 언덕들로 이어져 있는데, 그 언덕들의 상층부는 잡초나 칡넝쿨 따위들이 뻗쳐 나오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듯 버티고 있고, 그 하층부는 갯벌로 이어지면서 살짝살짝 허물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누군가 폐타이어들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중의 호안을 설치하였고, 밧줄에서 빠져나온 폐타이어들이 뻘에 박혀 서 있어 마치 어디로라도 도망칠 기세다. 바다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바위와 비슷한 성질을 가져 따개비나 어리굴젓, 고둥들의 삶의 공간으로 진화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지만, 폐타이어는 갯것들의 삶의 공간이 되기 어려운 물질인 모양이다. 겨우 따개비 정도나 띄엄띄엄 폐타이어에 붙어 있다. 폐타이어 호안 주변에 물구덩이도 버려져 있고 작은 배 한 척도 버려져 있다. 인간에 의해 버려진 이곳은, 인가에서 버리는 폐수 반, 마을의 뒷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산물 반이 섞여 바다로 흐르는 작은 모래갯골 따라 농발게와 짱뚱어들이 제멋대로 뛰놀고 있다.
작도는 한자로 작도(鵲島)라 표기하니 과거에 섬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지리적으로 봐서 도저히 섬이었을 리가 없었다. 곧바로 변산 산자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작도(鵲島)라 했을까? 구전에 따르면 이렇다. 고려시대 때 이곳에서 고려자기를 만들었다 하여 그릇 만드는 마을, 즉 ‘작도(作陶)’라 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이 소나무 숲속에 자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까치가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작도라 불렸다는 것이다. 1918년판 지도에는 구작리(舊鵲里)와 신작리(新鵲里)로 명시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작도는 ‘섬 아닌 섬’의 이름을 갖게 된 셈이다.


▲진서해안


▲필자가 걸은 진서 해안


까치똥섬

섬은 따로 있었다. 작도 마을에서 관선 마을로 이어지는 석포방조제의 바닷가 쪽에 방조제와 맞닿은 작은 암석섬이 하나 있다. 암석섬이지만 상층부 지표면에는 황토로 이루어져 소나무들이 크게 자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섬을 ‘까치똥섬’이라 부른다. 이 섬은 주민들이 보호해온 섬이라고 한다. 이 섬이 파괴되면 재앙이 온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절대 훼손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길이가 2km 정도 되는 석포방조제를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다. 방조제 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아 사람 키를 넘는 잡초들이 무성하고 작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기 때문에 갯가로 내려가 갈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장화를 신은 상태여서 잡초 숲을 파헤치며 나아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서 그런지 인적도 없이 고요했다. 방조제 아래 갯벌 위에는 칠게잡이 통들이 사선으로 늘어져 있으며, 따각따각, 굴들이 소리를 낸다. 입을 벌리는 모양이다. 바다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석포방조제가 감싼 진서면 석포리는 내소사 들어가는 입구 30번 도로의 삼거리를 중심으로 위치한다. 석포간척지는 여기서부터 1km 이상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지점까지 계속된다. 석포간척지 입구에는 여느 간척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송덕비가 하나 세워졌는데, 송덕비를 빙자(?)하여 간척지의 유래를 간략히 적어놓았다.

“○○○ 선생은 대구에서 1939년 2월 28일에 출생하여 현재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서 거주하며 ○○ 주식회사 사장으로서 서해안의 광활한 간척사업에 뜻을 품으시고 1975년부터 3년간의 숱한 각고 끝에 1개의 수문과 2km의 방조제를 3억2천만원을 들여 축조함으로서 30여만평의 간척지를 마련하였다. 이후 이곳 주민들이 개답하여 농지로 경작하면서 정부의 도움으로 장기 융자금 1억5천만원과 자기 자금 6천만원 도합 2억1천만원을 방조제 축조비로 상환하고 경작권을 인수받아 경작함으로서 풍요로움을 맞이하게 되었기에 그간의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석포지구 간척농지 경작인 일동은 뜻을 모아 이 송덕비를 세웠다. 1987년 9월 30일.”

석포방조제에서 운호방조제로 넘어가는 산 안자락에는 관선 마을이 있다. 마을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크기 또한 적당한 크기로 바다 위에  떠 있으되, 완성된 경관의 미학을 감상자의 시선에 단 한 번의 응시로 꽂아주기 위해 숨죽이는 죽도(竹島)에게서 나는 밀물과 썰물의 묘한 이치를 경험한다.
어디 이뿐이랴. 변산반도 해안은, 특히 줄포만 바다는 밀물 시간과 썰물 시간에 따라 뻘을 시나브로 드러내는 지형적 지문들이 상이하여 그 느낌들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조 때에는 푸른 바다로 가득하여 어선들을 안아주기에 충만하고, 간조 때에는 검은 갯벌로 드넓게 펼쳐지며 고창의 산야와 마주하여 마치 강물처럼 흐르기를 마다 않는다. 이 장면들은 마동에서 모항으로 넘어가는 갑을치 고개에서 만끽할 수 있다. 줄포만 바다의 미적 역동성일까? 거기에 죽도는 화룡점정인 게다.


▲해안은 높지 않은 언덕들로 이어져 있는데, 누군가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폐타이어들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중의 호안을 설치해 놓았다.


▲석포간척지 들판


바다는 모든 것을 녹여낸다

바다는 모든 것을 녹여내 버린다. 그래야 다시 또 오늘의 삶이 들락거리지 않겠는가. 줄포만 바다의 미적 역동성에 뒤질세라 관선 마을의 이웃에 있는 운호 마을에는 몇 해 전 미술관이 하나 들어섰다. 마을 입구 주변은 저녁에는 도시스러운 불빛들이 조금은 요란하게 펼쳐지는 야경이 이색적이다. 미술관과 모텔 등이 쏘아대는 야경이다. 미술관 관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자리에 모텔 같은 거 들어서는 것보다는 미술관이 들어선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주민들의 문화수준도 높이고.”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농촌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지역의 문화 중심지인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고 다시 학교는 여러 용도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미술관을 볼 때마다 농촌현실을 되짚어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어찌 보면 육중한 건축물마저 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정서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미술관을 지나치는 한 아주머니는 말한다.
“아주 잘 해놨다고 하데요. 근디 들어가 보지는 않았어요.” 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미술관은 문화공간으로서 전망 좋은 이 자리에 위치했다는 장소성의 의미만 부여되지 주민들과의 소통-친화성은 고려하지 않아 보인다. 주민들에게 미술은 딴 나라의 이야기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운호 마을에는 ‘미술관 옆 모텔’이 있다.
두 부류의 인간 풍경이 인상적이다. 하나는 운호방조제 끄트머리에서 마주친 낯선 20대 초반 ‘언니’들의 외계인스런 대화다. ... 저거 되게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통통 튀어? 와~ 저것 봐! 도마뱀이야 도마뱀! 도마뱀? 그냥 그렇게 불러보는 거야, 뭔지 몰라. 도롱뇽 아냐?... 방조제 바깥의 척척한 뻘에서 밀물에 밀려 통통 튀어다니는 짱뚱어들을 보고 하는 소리다. 짱뚱어들이 기겁해 도망간다. 운호방조제에서 운호리 쪽을 바라보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해간 산사람들이 살았던 신선대가 변산을 떠받치고 있다.
신선대 기슭에는 한국전쟁 이후 강대성(1890∼1954)이 세운 일심교 신도들 18가구 80여 명이 마을을 이루며 살다가 1970년대 중반 청학동으로 이주해갔다. ‘유불선동서학합일갱정유도(儒佛仙東西學合一更定儒道)’를 주창하며 현대문명과 담 쌓고 살던 그이들도 저 짱뚱어 짝이었을까?
또 하나는 운호방조제를 지나 왕포 마을로 올라가는 산 능선에서 마주친 노인네들이다. 왕포 마을 해안은 바위절벽이라 밀물이 찬 상태에서는 바위 위로도 통과하지 못하는지라 산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산 능선에서 바라보이는, 바다를 낀 주변 풍경은 또 다른 운치를 자극해준다. 높은 능선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시야가 훤하게 트여 있으며, 그물 쳐진 밭 한가운데로 펼쳐지는 지평선상에서 땅콩밭 풀을 매는 허리 휜 노인네가 또한 화룡점정이다.


▲관선불


▲관선불갯벌


왕포 할아버지

노인네는 깔끔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어가며 띄엄띄엄 나 있는 잡초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인상적인 프레임이라 사진 한 장 찍고서 그이에게 다가갔다. 아흔 살의 할아버지로, 여기 토박이이다. 집에 있다 심심해 잠시 나왔단다. 이 일대 밭은 옛날에 서울 사람들이 돈 대푼 주고 사갔는데, 농사도 안 짓고 놀리고 있어 주민들이 지어먹는단다. 그이는 평생을 어장(漁場)하며 살아왔단다. 왕포 마을의 산 증인인지라 계속해서 말을 들고 싶었으나 알아들기 힘든 말로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여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밭 아래 바로 해안 절벽가에 모텔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왕포는 한자로 ‘왕포(旺浦)’로 쓴다. 애초에는 ‘왕포(王浦)’였다. 『부안향리지』는 왕포(王浦)가 왕포(旺浦)로 바뀐 사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조선 말엽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변산을 일주하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금관자, 옥관자복으로 차린 80여명의 부안 장씨들이 시제를 지내는 것을 보았다. 풍수지리에 밝은 이서구는 군신봉의 묘소가 대명당이라는 것을 알고 시샘을 하여 즉시 파명을 명하니 그 묘소에서는 검은 황소가 뒷무릎을 세우고 앞무릎은 반쯤 세우고 있었고 황소의 등 위에는 3마리의 학이 앉아 있다가 각각 고창, 운호, 마동 방면으로 날아간 직후 황소도 온데 간데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 군신봉의 파묘자리는 백년 후면 소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씨들이 숯 한가마를 파묘의 석관자리에 묻었으나 훗날 확인한 바 숯이 흩어진 자리는 있으나 묻은 숯은 찾지 못했다고 하며 파묘 후 장씨들은 원인모를 질병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현재 그들의 선산인 운호 누에머리산(蠶頭山)에는 그들의 묘소가 순서 없이 흩어져 있는데 이서구는 군신봉의 묘를 파헤친 명을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왕(王)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 없을 시는 역적이 나올 묘자리라 생각되어 지나는 행인에게 ‘근방에 왕(王)자 있는 마을이 있느냐?’고 묻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없다고 대답하여 파묘를 명하였다고 하며, 나중에 알고 보니 왕포(王浦) 마을이 있었는지라 후회하는 눈치를 보이며 날 일(日)자를 붙여서 왕포(旺浦)로 개칭하여 자기의 과오를 변명하려 했다.”

왕포 마을도 포구로서 아담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앞 바닷가에 세워진 모정에는 50~60대의 아낙네들 대여섯 명이 드러누워 있다. 여름이면 어느 마을에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바닷물 지척에 둔 모정은 변산반도 해안에서도 이곳뿐이다. 모정 한 켠에서는 칼국수가 끓고 있다. 오후 때꺼리인 모양이다. 일 없이 놀아도 동네 사람들 모여 놀 때는 때꺼리가 있어야 흥이 더 난다. 그러다보면 또 술 한 잔씩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왕포나 작당의 마을은 아직은 어장생활이 주된 일상이다. 1970년대부터 해태양식도 해왔으나, 지금은 주로 쭈꾸미를 잡는다. 선상 낚시꾼들도 많이 몰려들었다. 운치 좋았을 왕포 바닷가와 작당 바닷가에 살을 붙여 조금은 흉하게 양어장 제방으로 이어져 있다. 한 주민의 말이다. “한 10년 전에 조성되어진 것인데 지금은 안 해요. 숭어를 키웠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작당마을 사람들에게서는 위태위태한 바닷살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생존의 본능이 느껴진다. 그러나 세월이 변하니 세대도 바뀌는 걸까, 나이든 할머니들은 이제 어장 나가는 것도 겁내 한다. 돈 몇 푼 벌려다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정의 아낙네들은 드러누워 있으면서도 도란도란 이야기의 끝이 없다. 화제는 예고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그게 담화의 본성일 테다.


▲운호


▲왕포할아버지



그러나 옛 이야기들일 뿐이다

왕포에서 양어장 제방을 통해 작당마을로 들어갔다. 변산반도 여행객들이 30번 도로를 타고 이곳을 지나칠 때는 ‘작당’이라는 마을 이름에 옛날 모반을 꾀하던 소굴이라도 되었을까, 하는 이미지가 장난스럽게 들 법도 하다. 그러나 작당은 까치 작(鵲)에 집 당(堂)이다. 옛날엔 마을을 까치당 혹은 ‘장촌(張村)’이라 불렀다. 400여 년 전 선조 때 흥성에서 들어온 장씨들이 정착한 뒤 뒷산의 까치 자웅이 내려와 정자나무에 둥지를 틀면서 마을이 번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부안향리지』에 따르면, 왕포나 작당 마을 앞바다는 옛날에 수백 척의 어선들이 모여들어 호세를 이루고 어부들이 투전장을 돌렸으며, “작당의 어선 불은 볼수록 유정하다.”는 노랫말이 있을 정도로 1940년대 전까지만 해도 칠산어장의 거점이었다. 특히 이곳을 포함한 줄포만 조기는 유명했다. 조기 울음소리에 잠을 설쳐댔다는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들물 때는 어염상선, 조선(漕船), 경강선(京江船, 세곡 운반배), 지토선(地土船, 토착민 배) 따위들이 드나들어 예로부터 ‘수로요해방수지지(水路要害防守之地)’로 인식되었고, 날물 때는 어전어업, 게와 조개잡이 따위들이 성행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칠산의 모든 바다들이 어전을 가장 많이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옛 이야기들일 뿐이다. 줄포만 바다의 어장도(漁場圖)는 엄청 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한 게 아니라 쇠락하고 있다. 갯벌이 드러나는 줄포에서 모항까지의 줄포만 직선거리가 15km 정도에 폭이 2km 내지 5km 정도면 상당히 큰 공간이다. 줄포만 바다는 다른 한편으로는 갯벌의 바다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줄포만은 갯골 따라 어장과 포구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줄포만은 어살어업의 중심지였다. 어살어업, 즉 어전어업은 전통적으로 어업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줄포만은 수심이 얕고, 대략 모항 앞바다까지는 갯벌이 드러날 정도로 조수 간만의 차도 커서 어살어업으로는 천혜의 조건을 타고났다. 나일론 그물망이 1960년대 들어서 보편화되면서부터 어전어업이 사양길을 걸었다. 동력선으로 바다 멀리 나가는 것도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줄포만이 더 이상 조업할 수준이 아니게 된 지도 한참이다. 줄포만 어장의 변화는 어장양식의 변화와 함께 동반되었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바다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왕포


▲작당



/고길섶_문화비평가

이 기사는 '부안이야기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 부안 21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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