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꾸미와 문어와 누런빛의 조기와

꽉 짜여진 도시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결혼과 함께 변산의 생활이 시작된 것은 1990년도 후반이었습니다. 부안까지의 외출도 어려웠던 초기에 버스가 노루목 근처를 지날 때였습니다.
내 착각인가 버스가 뒤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속 궁금함도 잠깐, 뒤를 보니 할머니 한 분이 서둘러 뛰어 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버스가 뒷걸음질을 친 것이고요. 순간 당황했던 것 같아요. 각박했던 도시 생활에서는 도무지 겪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날의 강렬한 느낌은 제 부안 생활, 변산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존중받고 서로 배려해 주고 지역공동체와 지역 문화를 따뜻하게 이어 나가는 일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부안에서 차를 타고 비득치를 지나면 가장 좋아했던 길이 나왔습니다. 바다와 인접해 파도가 치는 날이면 타고 있던 차창까지 바닷물이 튀었는데 역동적인 것도 멋있지만 왠지 영화나 CF속의 장면처럼 느껴져 그 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 기뻤는데, 새만금이라는 신기루로 파도가 없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물도 사먹게 될”거라고 하실 때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 되듯, 제가 격포에 살면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분 뒤에는 양동이를 들고 바닷가에 가면 갑오징어야 뭐야 지천으로 널려 있어 그냥 주워 담았다고 하면 믿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봤던 그 많던 쭈꾸미와 문어 누런빛의 맛있는 조기, 계화도에서 나왔던 그 많던 백합, 물속을 우주 비행선처럼 슝슝 날아다니던 가리비, 바닷가 돌 위에서 고추와 마늘을 얹어 소주 한 잔 곁들이면 그 싸함이 냉가슴을 풀어주던 갯굴이 많았다고 하면 믿을까? 한 해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다 환경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내변산의 추억

부안댐이 들어서기 전에 여름 휴양지는 내변산이었습니다. 신혼 때였는데 비포장 길을 흙먼지 날리면서 들어서면 산 밑에 아늑한 마을과 논밭이 있었습니다. 된장을 미끼로 어병을 놓으면 피라미들이 잡히니 매운탕도 끓여 먹고 아이들은 마음껏 수영도 했습니다. 96년도 여름 셋째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일 때 먹거리로 개를 준비하여 백천내 옆에 큰솥을 안치고 불을 때 개고기를 푹신 삶았습니다. 친정에서는 부모님이 절에 다니셔서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 날은 아무런 일 없이 엄청 맛있게 먹었습니다. 노산에다 젖까지 먹였으니 더 영양이 필요(?)했던 것인가 봅니다. 아무튼 그 맑던 하늘, 따뜻했던 차돌맹이, 예뻤던 막내딸 등 기억이 생생합니다.


▲1994년 내변산 백천 맑은 물에서 큰 아이 영택이와 함께

아이들이 제법 자라니 여유가 생겨 변산농협에서 모집한 산행반 모임에 들어가 10여 명이 변산 지역을 둘러보고 다녔는데 두어 번 산에서 길을 잃고(그때 독수리 5형제라는 만화가 있어 독수리 6형제라고 산속에서 이름을 짓고) 5~6시간씩 헤맨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신천지, 군데군데 변산바람꽃이 나지막이 피어 있었고 봉우리로 올라가면 변산이나 격포가 보이는데 내려가면 또 옴팍진 길이 나와 한참을 헤매고, 또 오르면 난데없이 두포 쪽 마을이 보이고.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변산은 장미 봉우리처럼 겹겹이 산이 있어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하더군요. 몸은 산을 오르고 있는데 눈은 바다에 두는 산행도 그때 첨 해 봤습니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기운

첫 아이 낳고 얼마 후 잠깐 식당을 했습니다. 누군가 책을 한 권 두고 갔는데 모항 사는 박형진 시인의 책이었습니다. 시인이 젊은 날 도시로 떠돌다 보름 무렵 격포에서 내려 버스가 끊긴 고향 집을 향해 밤중에 걸어가다가 아홉구미에 올라서니 모항 마을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 꽹과리 소리가 들려 고향에 돌아옴을 쓴 대목에서 알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을 받았습니다.
딱히 시골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도시에서 결혼할 때까지 부모님 곁을 떠나 본 적도 없는 제가 고향이라는 말, 전통이라는 소리, 지켜야 하고 이어져 나가야 한다는 어떤 것에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재작년 부안에서 농민회 행사로 차전놀이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 제 인생에서 두 번째 큰 기운을 느꼈습니다. 한민족의 절절한  역사가 내 가슴을 뚫고 들어온 듯한 연대감을 보았다고 할까요? 아무튼 저는 부안에서 이런저런 것을 느끼면서 부안 땅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격포항(1996년경). 큰아들 김영택이 만4살 정도 때 사진이다. 멀리 산 위에 팔각정이 조금 보이고, 바닷가는 아직 건물이 들어서기 전이다.


부안 사람들 참 대단해

부안에서 사는 지금껏 내가 경험한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핵폐기장 투쟁’일 겁니다. 주민을 농락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무시한 군수의 횡포에 맞서 생업을 포기하고 2년여 싸움을 했습니다. 군청 앞의 헬멧 쓴 전경의 키보다도 높은 곤봉, 도로공사 중인 전화국 앞에서 욕지거리를 하며 까맣게 달려들던 어린 자식 같은 전경들, 촛불 집회 무대를 포클레인으로 지근지근 무너뜨리던 권력의 광기. 결코 힘없는 자 편에 서지 않는 거짓 언론의 실상을 알게 되었고, 그 언론에 저항하며 고속도로를 걸어야 했던 시간들. 그러나 그 어렵고 처절한 시간들이 제겐 부안에서 삶의 이유와 보람을 느끼게 했던 계기였습니다.
핵폐기장 싸움 2년 동안 어쩌면 그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숨어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었고, ‘문화행사’가 없었던 지역에 밤마다 문화행사가 차고 넘친 그때처럼 의미 있고 활기찬 시간이 또 올까 그립기까지 합니다. 부안 곳곳을 돌며 “주민투표해 주세요” 하고 다니면서 내 지역의 아름다움, 할머니들의 굳센 주장, 까만 가방이 허옇게 덮일 때까지 눈비 속에서도 굳건했던 의지들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그야말로 농사를 지으면서 ‘님은 먼 곳에’라는 장사익의 농익은 노래를 듣기도 했고요.
시아버지께서 한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 왜 살아계실 때 그 말을 못했던가 하고 울었습니다. “부안 사람들 참 대단해요”라는 말이지요. 부안 사람들은 주민 소환제를 이끌어 내고 주민 자치를 만드는 등 지역 주민이 주인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부안과 함께 과장되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으며 부드럽게 스며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농한기나 휴어기 때 주민들이 쉬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자그마한 도서관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대화의 꽃을 피우고 미래를 설계하고 아이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자산을 생각하는 그런 공간이 그립습니다.


/박향란 채석강수산

'부안이야기' 10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 21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