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신이 거주할 곳을 선정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했다. 살기 좋은 곳을 선정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반면 살기 좋지 않은 곳을 선택하면 곧바로 자손이 끊어지고 몰락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가거지(可居地) 즉 ‘사람이 거주할 만한 곳’을 선정할 때는 대략 4가지 기준이 있었다.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가 그것이다. 지리는 풍수적으로 말하는 길지(吉地)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고, 생리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물산이 풍부한 지와 물자의 교류와 인적 왕래 등 교통이 편리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심은 주위와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풍속이 어떠한 지를 따져보는 것을 말하며, 산수는 주위에 즐길만한 풍광의 산과 내[川] 등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우반동은 길지(吉地)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면 전라도 부안에 있던 우반동은 사람이 살만한 곳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반동은 조선시대의 지명으로 지금의 부안군 보안면 우동마을과 그 인근 지역을 지칭한다. 먼저 지리 면에서 살펴보면 비록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우반동은 길지로서 이름이 있었다. 우반동은 험준한 산세와 우거진 수풀 등으로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땅이 펼쳐지는 일종의 분지와 같은 형세를 한 길지였다. 지금은 줄포에서 곰소를 가는 도로가 만화동 앞으로 나 있어서 밖에서도 우반동이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도로가 해안으로 나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는 우반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은둔지 형태였다. 더군다나 안으로 들어오면 많은 사람들이 거처하기에 아주 적당한 평지와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있었다. 또 뒤로는 숲으로 우거진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있으며 마을 한 가운데로는 반계라는 긴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쓴 「정사암중수기(靜思庵重修記)」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정사암은 부안 출신으로 조선 중기에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를 역임했던 김청(金淸)이 노년에 휴식하기 위해 우반동에 지은 암자였다. 공주목사였던 허균은 그 자리에서 파직된 후 부안현으로 내려와 우반동과 인연을 맺게 되며 이 글을 남겼다.  

부안현(扶安縣)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磻)이라 한다. 그 고을 출신 부사 김청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 하여,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사신(使臣)으로 호남을 왕래했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우반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했다. 김청의 아들 진사(進士) 김등(金登)이 “제 아버지의 낡은 오두막이[弊廬]이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께서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고달부(高達夫) ....... 등과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살펴보았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소리가 옥 부딪는 듯,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 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가지 않아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의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세 사람과 함께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아직도 사람 살던 집이 예전에 있었던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우반동은 은둔지 형태이면서도 풍치가 아름다운 터전이었다. 이곳이 길지라는 것은 우반동에 현재 남아있는 고인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이곳에 사람이 정착했을 만큼 여건이 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고사는 데에도 매우 좋은 곳

우반동은 또한 물산이 풍부한 천혜의 마을이었다. 뒷산 줄기는 내변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영험한 약초와 맛 좋은 과실수가 온 산에 가득했다. 마을 앞으로는 줄포만과 곰소만을 잇는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었는데 이 해변은 ‘물 반 고기 반’이어서 맨손으로도 고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어자원이 풍부했다. 마을 안의 토지는 평평하고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우반동은 생리 즉 먹고사는 데에도 매우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도 앞서 소개한 허균이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하고서 우반동으로 내려온 후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가을 날씨가 점점 서늘해지는데, 엎드려 묻건대 섭양(攝養)은 더욱 좋으신지,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우는 마침내 탈 없이 파직되었으니 아주 원하던 대로 부합되었습니다. 당연히 곧 서울로 돌아가서 형님과 함께 베개를 나란히 베고 자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 건데, 구설의 곤욕을 너무도 많이 입었으니 멀리 도망가서 그 사나운 운수[厄]를 완전히 녹여 없애고자 하옵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작정하고 북쪽 하늘을 쳐다보니 정회(情懷)가 더욱 슬퍼졌습니다......
변산(邊山)의 남쪽 기슭에는 우반곡(愚磻谷)이 있습니다. 그 안이 기름지고 평탄하여 수석(水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습니다. 두 이씨(李氏)를 데리고 가서 집터를 정해 놓으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그윽하고 고요해서 실제로 은자(隱者)가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지역이 또 바닷가여서 물고기나 조개의 생산이 풍부하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들더라도 사람이 죽을 리 없습니다.
심군(沈君: 당시의 부안현감인 심광세를 지칭한다.-인용자주)이 (아우를 위해) 목수(木手)들을 모아 나무를 베어서 이미 시냇가에 몇 칸의 집을 지어 놓았으니 이러한 곳에서 배회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서울까지의 거리가 겨우 닷새 길인데 큰 언덕, 높은 고개나 큰 강이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형님 뵙고 싶은 정(情)이 간절하게 일어나면, 아우는 마땅히 한 필 말로 달려갈 수 있으니 어찌 일에 편의하지 않겠습니까.

인심이 좋기로는 우반동이 전국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았다. 예로부터 인심은 광에서 난다고 했다. 부안은 자원이 풍부하고 물산이 넉넉하니 자연히 인심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등이 일면식도 없던 허균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머물던 정사암을 수선해서 머물 수 있도록 선선히 허락한 것을 보면 당시의 부안지역 인심을 가히 알 수 있다.


인심 나고 사람 나고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인심이란 우리가 현재 널리 쓰고 있는 ‘남의 처지를 알아주고 헤아려 도와주는 마음’만을 가리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인심이라는 말은 그보다는 오히려 예절을 존중하고 문학을 숭상하는 풍조에 더욱 가까웠다. 그러나 그러한 측면에서 따져보더라도 당시의 부안은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좋은 인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김청이 노년에 한가하게 지내기 위해 지은 정사암은 빼어난 풍광으로 소문이 널리 나서 당시의 유명한 문필가들이 몰려들었다. 허균이 우반동을 방문했을 때 그와 동행했던 고달부가 그런 예이다. 사실 그는 부안 청호리 제주 고씨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고홍달(高弘達)로 시를 잘 지어 허균을 비롯하여 석주(石洲) 권필(權?),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등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나 문인들과 널리 교유했다. 또 그의 처가(妻家)가 당시에 문명(文名)을 떨치던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행(李荇)의 집안이라는 사실을 보면 문학을 숭상하던 당시의 부안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당시 부안에는 시와 가야금에 능했던 유명한 기생 매창(梅窓, 1573~1610)도 있었다. 비록 허균이나 권필과 같은 유명한 시인은 아니더라도, 능숙하게 시를 화답하고 거문고나 가야금을 뜯을 줄 아는 문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우반동이 자리한 이곳 부안에 한동안 머물며 고홍달 같은 시인이나 매창과 같은 기생과 어울려 시를 화답하고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반십경

우반동의 산수가 빼어난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글에 이미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이처럼 인심이 넉넉하고 산수가 빼어난 곳을 구경하면 반드시 글을 남겼다. 직접 우반동에 들어와 살면서 주위의 빼어난 풍광을 노래한 인물로는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을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마을에는 고인돌이 현존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선사시대 이래 줄곧 사람들이 거주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추적해보면 허진동이 실제 우반동에 거주하며 기록을 남긴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이며 동시에 우반동을 역사에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동상집(1870년 발행, 허상균 소장)에 우반10경이 실려 있다.


▲1887년 발행된 부안읍지(허상균 소장)에 풍뢰당(風雷堂)이 소개되어 있다.

허진동은 우반동에 풍뢰당(風雷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인과 묵객을 초청해서 함께 시를 짓고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반동 주위의 빼어난 풍경을 시로 읊은 ‘우반십경(愚磻十景)’이다. 이를 하나하나 소개하면 ‘사포의 떠들썩한 상선[沙津賈舶]’, ‘죽도의 고기잡이 등불[竹嶼漁燈]’, ‘검모포 수군(水軍)의 저물녁 호각소리[黔毛暮角]’, ‘수락사의 새벽 종소리[水落晨鐘]’, ‘비 개인 후 선계 폭포[仙溪晴瀑]’, ‘배고개의 울창한 소나무[梨峴長松]’, ‘황암의 고색창연한 고적[黃巖訪古]’, ‘창굴암의 고승[蒼窟尋僧]’, ‘심원에 노니는 사슴[深源觀鹿]’, ‘어살 가득한 고기잡이[神箭打漁]’ 등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허진동이 지은 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그와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노래한 사암 박순의 우반십경만 전해질 따름이다.
이 우반십경 중 사포와 죽도는 현재 흥덕과 고창에 속해 있으나 곰소만 건너편에 있고 당시에는 뱃길이 주된 교통수단이어서 같은 생활권 안에 있는 아주 가까운 이웃이었다. 또 검모포는 우반동과 이웃해 있는 진서리의 구진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수군의 진이 있었다. 수락사와 창굴암 등은 우반동 인근에 있었던 암자로 추정되는데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비 개인 후 선계 폭포’는 우반동의 풍경을 노래한 것으로 현재에도 가끔 이 폭포를 볼 수 있다. 보통 때에는 볼 수 없지만 한여름에 폭우가 쏟아지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개인 후에 우반동에서 바디재를 넘어가다보면 마치 공중에서 쏟아지듯 기암절벽에서 폭포가 쏟아지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는데 그 광경을 보노라면 내가 신선의 세계에 와 노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박순은 이 선계폭포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결같은 맑은 소리 구름 끝에서 쏟아지고(淸聲一注來雲抄)
번쩍이는 푸른 벼랑에 모인 물 쏘는 듯 떨어지네(閃閃靑崖謝亂潨)
하얀 명주 비단 같은 물 은하수와 견줄만하고(白練銀河徒比並)
신령스런 맑은 샘 있는 곳 누가 다 찾으리(靈源澄處有誰窮)


▲선계폭포

그러나 허진동이 대대로 살던 부안현 보안의 성메(城山)에서 인근에 있던 우반동 동상(東湘)마을로 이거한 까닭은 단지 이곳의 풍광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곳 우반동을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사실 우반동이 조선시대 내내 문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된 이유도 바로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우반동을 군자동으로

우선 허진동의 이력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진동은 부안에서 세거하던 태인(泰仁) 허씨(許氏) 출신으로 자(字)는 백기(伯起), 호(號)는 동상이었다. 그의 집안이 부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조(高祖) 허사문(許斯文)이 태인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하고, 증조(曾祖) 허승원(許承元)이 이 지역 토성(土姓)인 보안(保安) 임씨(林氏)와 혼인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어려서 외숙인 사암(思庵) 박순(朴淳)에게서 글을 배워 이른 나이에 과거시험에 응시해서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그러나 마침 외숙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시험[覆試]을 포기하고 외숙을 따라나서 드넓은 세계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후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가 참봉, 찰방, 판관 등을 역임했으나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웃과 함께 향약(鄕約)을 실시했다. 그 결과 마을의 풍속이 크게 변화하자 인근 마을 사람들이 우반동을 군자동(君子洞)이라 불렀다. 그는 또 자신의 집 뒤에 학당(學堂)을 지어 고을의 젊은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웠던 우반동에 대한 언급들이 허진동이 이곳으로 이거한 이후부터 기록되고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허진동이 그곳에 살면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시켜 군자가 거주하는 마을이라는 칭호를 얻었기 때문에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진동과 거의 같은 무렵에 우반동에 살았던 인물로는 위에서 이미 소개한 김청이 있었다. 그는 부안에 세거했던 경주 김씨 출신으로 자는 덕형(德泂), 호는 지재(止齋)라 했는데 1553년의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서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했다. 그가 우반동에 정사암이라는 암자를 지어 시인과 묵객을 불러들이기 이전에 부안의 어느 곳에 세거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도 허진동처럼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이곳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못다 한 꿈을 실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현실사이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반동을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은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허진동의 아들은 모두 한양에 머물고 있었으며, 김청의 아들은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진동의 큰아들 허구연(許九淵)이 158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셋째 아들 허구전(許九田)은 1612년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또 넷째 허구잠은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자 무과에 응시해 급제해 선전관을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허구연이 진사시에 합격할 당시의 합격자 명단[司馬榜目]에 거주지가 경(京)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허진동의 아들은 과거 공부나 벼슬살이를 위해 한양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허진동이 우반동을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그가 사망하자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간 것 같다.
김청의 아들 김등은 1605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합격했다. 합격자 명부에 의하면, 김등의 당시 거주지는 부안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김청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 앞에서 소개한 ?정사암중수기?에서 김등이 허균에게 “제 아버지의 낡은 오두막이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께서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김등은 아예 우반동으로 들어오지 않은 듯하다.


허균의 꿈과 우반동

허진동과 김청에 이어 우반동에 들어온 인물로는 바로 허균을 들 수 있다. 그는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후 부안으로 내려와서 우반동에 아예 눌러 살 계획을 줄곧 가지고 있었다. 우반동과 전혀 인연이 닿지 않았던 그가 이곳으로 이거하려고 결정한 것은 우선 우반동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였다. 물론 그가 이곳으로 이거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 심광세가 부안의 수령으로 있어서 정사암을 수리해 거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아울러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 등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사암중수기?나 허균이 심광세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을 수령인 심덕현(沈德顯; 심광세의 자-인용자주) 군이 암자가 피폐하되 보호하는 이가 없음을 보고,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더해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한 뒤 관역(官役)을 바꾸어 거기에 머물러 지키도록 책임지웠다. 암자가 이로 말미암아 복구되었다.

남도(南道)의 주인은 오직 우리 형만 믿으니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데에 다만 두어 종[數奴]의 호역(戶役)만 감해 준다면 나는 의당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가을바람이 슬슬 불고 귀뚜라미가 한창 울어댑니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니 기러기와 함께 날아가고 싶습니다.

허균이 우반동으로 이거한 또 다른 이유는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정사암중수기」에서 “나는 본시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었다.”고 회고하였다. 상자평은 후한(後漢) 시대의 고사(高士)인 상장(尙長)을 말하는데 그가 벼슬을 버리고 입산(入山)했기 때문에 은둔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거론하는 인물이었다.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되자 조용한 곳에서 은둔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심정은「정사암중수기」에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 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소위 정사암이란 데에 이르니, 암자는 방이 겨우 네 칸이며 바위 언덕에다 지어 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높이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절벽에 쏟아져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산발(散髮)하고 옷을 풀어헤친 채 못 가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살짝 피고 단풍은 반쯤 붉었는데, 석양이 산봉우리에 비치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시내를 굽어보고 하늘을 쳐다보며 시를 읊조리니, 금새 티끌 세상을 벗어난 느낌이어서 마치 안기생(安期生)ㆍ선문자(羨門子)와 함께 삼도(三島)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하늘이 나에 대한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소위 관직이 무슨 물건이기에 사람을 감히 이와 같이 조롱한단 말인가.

안기생과 선문자는 진(秦) 나라의 선인(仙人)이었으며 삼도는 신선들이 머문다고 알려진 봉래(蓬萊), 영주(瀛州), 방장(方丈)의 삼신산(三神山)을 지칭하는데 허균은 이처럼 풍치가 뛰어난 우반동에 아예 은거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허균이 우반동으로 이거한 것은 단지 은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또한 그곳에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우반동으로 갈 때 그와 뜻을 같이 한 이재영 등과 함께 갔으며 또 그곳에서 수령인 심광세와 어울리면서 자주 문회(文會)를 열었다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으면 그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심덕현이 부안에 있었으므로, 내가 처모(妻母)를 문안하기 위해 고부에서 찾아가 두세 차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허균(許筠)과 이재영(李再榮)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문도(門徒)를 많이 거느리고 그 고을에 우거(寓居)하면서 심덕현과 문자의 모임을 열었기에, 내가 우연히 그들의 시운(詩韻)을 써서 혼자 읊어 보았다.

허균이 이처럼 수령인 심광세의 지원 아래 뜻을 같이 하는 문도들과 문회를 자주 열자 그의 반대파들은 이 모임이 역모를 위한 모임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우반동에 은거하거나 정착하지 못했다. 그의 반대파들이 역모 사건을 꾸며 그를 옭아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반동으로 돌아가려는 허균의 집념은 대단했다. 그가 유배지를 함열로 택한 것은 해배 후 우반동으로 돌아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역모 혐의를 받고 죽게 되어 그 꿈조차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부안현 우반동은 사람이 거주하기에 알맞고 물산이 풍족하며, 인심이 두텁고 풍치가 뛰어난 길지였다. 이곳은 시인과 묵객이 머물기를 갈망하는 터전이었으며, 그들은 이곳에서 이상향을 꿈꾸곤 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어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곧 이곳으로 낙향하여 국가 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쓰며 이상사회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부안의 우반동은 그처럼 아름답고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부안이야기 10호> 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