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산 서림정

'고향, 여전히 누군가의 희망인 곳'
성황산 주변의 내 어릴 적 놀이터

사랑땜도 못한 색동고무신 한 짝

내 어릴 적 추억 한 편에는 ‘물’이 있습니다. 마음 아린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색동 고무신 한 짝입니다. 두고두고 안타까운 그 장면은 아마도 ‘물’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난, 왠지 물이 있는 곳이 좋았고 물을 보면 빨래를 하고 싶었고 발을 담그고 싶었으며 물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6살쯤의 일로 기억됩니다. 어느 초여름 비가 개이고 환한 햇볕이 비추던 날, 지금의 행안초등학교 앞으로 나 있는 큰 길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댁(행안면 진동리)에서 놀던 나는 그 깨끗한 개울물을 따라 풀잎을 따 띄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게 지루했던지 새로 사 얼마 되지 않은 색동고무신을 말아 배를 띄웠는데 어느 사이 물살이 출렁이더니 내 색동고무신을 삼키고 막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난 잡을 수가 없었기에 발을 동동거려도 누가 건져 줄 사람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망연자실, 결국 아직 사랑땜도 다 못한 그 귀한 색동고무신 한 짝을 개울물에 떠내려 보내고 하염없이 울다가 맨 발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내 마음 밑바닥에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그 색동고무신!


▲혜천


물의 추억!

이처럼 아린 추억이 있는 것은 어린 시절 물을 좋아했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물을 좋아했던 저는 성장해 가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 늘 맑은 물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 남편에게 그 마음을 내비친 것은 데이트를 하던 시절입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던 곳에 물이 흐르는 계곡이 보이자 “아, 저 물에 빨래하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저는 그 말을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고두고 남편은 제 순수한 마음이라고 표현해 줍니다.
지금은 부안 사람들이 전국에서 가장 수질이 좋다는 부안댐 수원지의 물을 먹고 쓰고 있지만, 어릴 적 부안읍 서외리는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습니다. 또 우물이 있었던 곳도 짠물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빨래를 하기 위해서는 물이 짜지 않고 물도 많은 우물이 있는 곳을 찾아 멀리 가야 했으며, 비가 좀 오지 않는 때에는 행안면 진동리에 있던 방죽으로 빨래를 이고 가서 해오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물가에서 놀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물이 귀함을 일찍 알고 자랐으며 맑은 물이 흐르거나 샘물이 넘실대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을 씻어보거나 손수건이라도 적셔보곤 했습니다.
또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집에 물을 길어다 주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저희 집에는 우물이 있었지만 물의 양이 적었고 물 또한 짜서 식수로는 적당치 않았기에 먹는 물은 사서 먹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물을 배달해 주는 아저씨는 성황산의 향교 밑에 있는 우물에서 큰 양철동이에 물을 길어 지게에 지고 와서 부엌 땅에 깊숙이 묻힌 커다란 항아리에 부어주면 그것으로 식수 및 기타 필요한 곳에 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 향교 밑에 있는 우물은 산 아래여서인지 물도 많았고 물맛도 좋았습니다. 이처럼 물이 귀해 사먹어야 했으니 물이 있는 곳이 그리웠고 맑은 물이 있는 곳이면 마냥 좋아 놀고 싶었나 봅니다.
성황산 아래쪽 돌팍거리라 불리던 곳에는 빨래터가 있었습니다. 그 곳은 암반으로 깔려 있었는데 물이 흐르고 있어서 빨래터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비라도 내린 다음 날이면 그 곳에는 큰 통을 이고 와 빨래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곤 했습니다. 흐르는 물이라서 위쪽에 있는 사람이 빤 뿌연 비눗물이 내려와도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그냥 빨아야 했습니다. 위 사람이 가고나면 한 자리씩 위로 올라가 빨래를 하는 곳이었지요. 그러니 여름방학이 되어 비라도 내린 다음 날에 양말 두어 개 대야에 담아 가면 어른들이 없는 시간에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공회당 밑 돌계단


추억이란 왜 이리 소중한지

어린 시절의 방학은 매일이 신나는 휴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하려는 학교의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아침마다 애향단별로 마을에 모여서 6학년 언니들에게 출석 점검을 받고 애향단장의 주도로 조기체조를 한 뒤 수수비를 들고 동네 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우리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마을 당산이 있는 널찍한 공터에서 아침부터 술래잡기와 사방치기 등으로 시끌벅적하게 놀았습니다. 그 곳은 어릴 적 생각으로 한참 올려다보아야 하는 크고 무서워 보이는 당산이었지만 그래도 넓은 공터는 아주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그 곳에선 정월대보름이면 신명나는 풍물소리가 울려 우리 꼬맹이들을 모여들게 했고 휙휙 돌아가는 상쇠의 고깔모자 따라 나도 목을 길게 늘여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리도 들썩였던 것 같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까지도 언니 오빠들은 재미있게 제기차기와 딱지치기, 고무줄놀이를 하였기에 거기에 가면 언제나 즐거웠고 구경거리가 있었습니다.(지금의 그 곳은 원불교당 근방이며 당산은 자리를 옮겨 그 맞은쪽에 조성되어 보호되고 있음)
거기서 한참을 놀다 덥고 지루해지면 우리 친구들은 빨래터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 세수도 하고 맨발로 물장난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장난이 심한 때는 바위에 미끄러져 무릎에서 피나는 줄도 모르고 손 물총 싸움에서 이길 양으로 손바닥에 물을 움켜쥐어 쏘아댔던 그 상쾌한 아침의 풍경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 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추억이란 왜 이리 소중한지 육십을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그 때가 생각나면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집니다.


▲성황산의 심고정 밑 비탈길


놀 거리는 언제나 많았다

그 당산 공터에서 골목을 따라 성황산으로 올라가면 심고정(審固亭, 활을 쏘던 곳으로 지금은 스포츠파크로 옮겨가고 빈터만 남아 있음) 위쪽의 육모정이라 불리던 서림정(西林亭)에 앉아 공기놀이(작은 돌멩이 다섯 개로 하는 손 놀이)를 하며 재잘거렸습니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그 아래쪽에 맑은 석간수가 똑똑 떨어지는 옹달샘 혜천(惠泉)에서 약수를 받아 먹어가며 다른 놀 거리를 찾곤 했습니다.
성황산에 오르면 놀 거리는 언제나 많았습니다. 새싹이 돋는 봄이면 대바구니 하나에 작은 칼 담아 나물 캐러 다녔고, 토끼풀 꽃이 피어나는 때는 풀밭에 앉아 꽃반지를 만들어 서로 자기 것이 예쁘게 만들어졌다고 뽐내기도 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그 풀들의 싱그러운 내음은 언제나 우리들을 안아주었고, 한 여름 숲속의 그늘은 더없이 시원하였습니다. 실컷 놀고 내려오면서도 더 놀고 싶어 아카시아 몇 줄기를 따가지고 공회당(지금의 부안가정교회 자리) 아래쪽으로 나있는 계단에서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며 한 계단씩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시한 놀이에도 즐거웠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네 살 위인 오빠 밑으로 태어난 막내여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 방학이 가까워지자 아빠를 졸라 일찌감치 썰매를 만들어 놓고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빠는 나무판 몇 개와 굵은 철사로 근사한 썰매를 만들어 주셨는데, 덤으로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불에 굽고 휘어가며 스키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겨울 방학 내내 저는 오빠를 따라 다니며 성황산 심고정 밑으로 나있는 비탈길에서 온몸으로 썰매를 타며 놀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일찍 오셨던 큰 오빠에게 옷에 눈이 덕지덕지 붙어 들어오는 제 모습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여자아이가 선 머슴애처럼 놀고 다닌다고 호되게 야단을 맞고 그 벌로 3일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하고 국어책을 외워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벌이 두려웠으나 3일 안에 외워야 또 썰매를 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몰입했던지 저는 신기하게도 그것을 달달 외웠습니다. 그 때 터득한 외우는 방법이 제 학창 시절 외우는 공부는 두려움이 없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안 향교 밑 샘터


고향, 여전히 누군가의 희망인 곳

이렇게 자연의 변화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던 내 어린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 시절 어우러져 즐거웠던 어릴 적 동네 친구들! 남숙아, 화연아, 경순아~
살아온 세월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늘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아름다운 성황산 주변의 풍경과, 같이 웃고 놀았던 우리들이라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내 어릴 적 추억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맑게 흐르던 물줄기의 빨래터는 찾을 수 없었고, 그 자리쯤에 부안읍 교회와 원불교당이 현대식 건물로 들어서 있고 바닥도 시멘트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이곳에 흐르던 물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습니다. 또 약수라고 불리며 우리에게 꿀맛 같은 물로 목을 축여주던 옹달샘 자리에는 샘 둘레의 돌만 남아있고 붉은색 글씨의 수질검사 결과 부적합이라는 사용 금지 경고판이 세워져 있어 제 입을 더 갈증 나게 하였습니다.
심고정도 옮겨가고 빈터에 표지석 하나 남아있는 내 전용 썰매장이었던 비탈길을 내려오며 또 한 번 추억 속 장면들을 꺼내봅니다. 까르르 웃어대는 친구들의 얼굴 위로 주름진 친구들의 모습이 겹쳐져 옵니다. 비록 우리들의 모습이 흰머리가 늘고 허리가 굽어서 변했으면 어떠랴~~ 힘이 되어주는 동네 친구들이 있고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살 수 있는 넉넉한 마음만 지니고 있다면 내 고향 부안의 이야기는 여전히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강귀자(전 부안동초등학교 교장)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