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가는데"

벚꽃과 시내, 바다와 산이 어우러졌던 고향 마포의 기억(1)

산내면 마포리는 마음의 고향

필자가 고향에서 온전하게 살았던 기간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까지 정확하게 6년간이다. 하지만 그곳은 항상 내 마음에 진정한 고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년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부안 읍내 가까운 행안면에 소재한 큰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어 떠나게 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고향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십리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걸어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의 변산의 모습은 개발이 되어 마치 곳곳이 리조트 타운 같은 지금의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마을에 학교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우리 마을은 그야말로 학교 건물도 없이 느티나무 밑에서 공부하는 그런 오지나 다름없었다.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나 지나가는데 도로는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자갈로만 깔려있었다. 그래도 버스가 지나가는 길이니 농로보다는 제법 도로다운 면모가 있어서 신작로라고 격상시켜 불렀다.


신작로 양쪽으로 쭉 늘어선 벚나무

마포 산기마을의 명물은 역시 신작로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던 벚나무가 아닐 수 없었다. 행안면에 있는 고성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부모를 떠나 조부모와 작은집 식구들과 함께 살았지만 어린 마음에 항상 변산을 생각하고 우리 마을 입구부터 쭉 늘어서 있는 벚꽃을 생각하곤 하였다. 물론 이 벚꽃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이긴 하지만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봄이 되면 마을을 온통 환하게 비추어주곤 하였던 것이다. 이 벚나무는 요즘 길가에 조성된 벚꽃놀이 나무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거목이었던 모습이 지금 기억에도 생생하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고향의 봄’에 나오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사에 나오는 꽃이 아니라 우리 동네 도로변에서 바람에 날리던 벚꽃 꽃잎을 연상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무도 나이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절감하게 한 것도 고향의 벚나무들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의 삼거리에 위치한 큰 상점이어서 벚나무와 항상 호흡을 함께 하는 느낌을 주었는데 언젠가부터 큰 가지들이 부러지고 줄기에 큰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는 거대한 벚나무는 영원히 하얗고 연분홍빛 벚꽃으로 동네를 비추어 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무가 하나씩 줄기가 썩어 들어가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건 비극이었다. 그 후 벚나무가 흉물처럼 드문드문 남게 되자 동네에서는 아예 뿌리째 없애버렸던 같다. 나는 세월이 지나서도 동백기름을 발라 가지런히 머리를 빗은 어머니 손을 붙잡고 벚꽃이 환하게 피어있던 신작로를 걸어가던 추억을 더듬어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가는데”라는 시를 아래와 같이 쓰게 되었다.

어머니도 아름다운 적이 있었다

저 벚꽃처럼
동백기름 바른 흑색머리칼을
정갈하게 빗고
신작로를 환하게 밝히며
걸어가곤 했다

고운 치마폭에 휩싸여
따라가던 수줍은 소년은
흰눈처럼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황홀하게
보고 또 보며
꿈에 잠겼다

이제 늙어
꼬부라진 허리를 펴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벚꽃 하얗게 떨어진 길을
비쩍비쩍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갈대보다 가벼운 어머니
손을 부여잡고
꽃길을 걷는데
떨어지는 눈물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가는데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가는데〉 전문


▲마포 마을(삼발리 모퉁이에서)/성천항 너머로 마포 들판이 전개되고, 왼쪽의 옥녀봉과 오른쪽의 백마산 아래에 마포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굽이굽이 흐르던 시냇물

우리 동네 마포에서 줄포 쪽으로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유유동이란 마을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물길이 시내가 되어 굽이굽이 마을 아래로 흘러갔다. 이 시냇물은 마을 꼬마들이나 젊은이,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겨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각자가 시냇가로 가는 시간이나 경로는 조금씩 달랐다. 아침에는 시내와 가까운 집 주민들이 눈을 부비며 수건 한 장 들고 산보 겸 세수하러 어슬렁어슬렁 그곳으로 향하였다. 마치 시냇물이 밤새 머리를 어지럽히던 꿈을 말끔히 씻어주기나 하듯 입으로 허푸허푸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 사람들의 이런 행태는 마치 하나의 제의적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낮에는 항상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특히 여름철에는 시내의 모래와 조약돌 둔덕은 기가 막히게 좋은 놀이터였다. 뜨거운 햇볕이 비치면 물풀들이 우거진 그늘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물속에는 이끼 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물고기는 소년들의 친구이자 장난감이 된다. 그 물고기를 잡으러 돌맹이를 이리저리 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덧 여름의 열기도 식어가고 오히려 저체온으로 덜덜 떨면서 조약돌밭으로 기어 나온다. 소년들은 물속에 한참 머리를 처박고 놀았던 터라 귀속에 물이 차서 멍해진 귀에 따뜻한 조약돌을 댄다. 그리고는 조약돌 밭에 한참을 누워있으면 차가워졌던 몸도 따뜻해지고 귀속의 물도 흘러나와 조약돌을 적시곤 하였다. 이제 소년들은 조약돌 놀이를 시작한다. 조약돌로 탑을 쌓거나 성을 축조하는 꼬마 건축가나 조각가 되어 꿈속의 나래를 펼치던 시절이었다.
소년들은 시냇가나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짓궂은 장난을 하기 일쑤다. 그 길은 돌아가면 농로로 이어지기도 하고 산으로 들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이다. 소년들이 즐길 수 있는 장난감은 거의 자연에서 나온다. 길옆에 늘어선 아카시아 잎사귀를 뜯어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손가락으로 튕겨서 누가 먼저 모두 떨어뜨리는지 경쟁하는 놀이였다. 먼저 떨어뜨리는 소년이 친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타격하는 재미있는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 소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은 길 양편에 늘어선 들풀이다. 개구쟁이 끼는 약간은 악동의 심리에서 작동한다. 들풀 중에서 엉겅퀴는 상당히 길고 질긴 줄기를 지니고 있다. 양편의 엉겅퀴나 긴 들풀을 묶어놓으면 걸어가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시냇가에서 뒤따라오는 동무들이 숨겨져 있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장면을 상상하면서 낄낄거리며 돌아오는 악동들의 유년시절은 밉기보다 참으로 귀엽지 않은가. 필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잊혀진 길의 노래”란 시로 이 장면을 묘사하고자 한다.


어릴 적 살던 시골 떠난 후
언뜻언뜻 떠오르는 길
학교에서 우리 동네로 가다가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수수밭을 거쳐
메뚜기 날뛰던 논둑길

자전거 가끔 오갈 뿐
한적한 황토색 언덕으로 이어지고
자치기나 민둥산 오르내리며
전쟁놀이를 벌이다 시들해져
놀 거리 없어 따분했던 동무들
텅 빈 들녘에 서서
멍하니 황혼 바라보다
터덜터덜
집으로 기어들어 오던 길
친구들과 놀다 지치면
죄 없는 풀덤불에 발길질 하고
맥없이 뜻도 모르는
야한 욕설도 하고
심술이 나면 어둠을 틈타
오가는 이들 넘어지게
기다란 엉겅퀴 풀잎 묶어놓고
킥킥거리며
돌아오던 정든 길

        〈잊혀진 길의 노래〉 전문


오후에는 마을 아낙의 빨래터

오후가 되면 시내는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가 된다. 그 당시 마을 집집마다 우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좁은 우물에서 빨래하는 것은 오히려 번잡하기만 하다. 처녀들이나 아낙들이 빨랫감을 찌그러진 양동이에 들거나 머리에 이고 시내를 향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잡히는 풍경이었다.
이 시간이 되면 시냇가 빨래터는 한참 시끄러운 수다를 떨거나 동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는 여인들의 아지트가 된다.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기를 펼 수 없었던 마을의 여성들은 이 시간을 이용해서 동네의 담론을 즐기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노래 한곡씩 뽑아 올리는 경연장을 즉흥적으로 만든다. 이들의 노래는 몰래 감추어두었던 끼를 발산하게 하고 노동으로 힘든 삶의 피로를 풀어주는 진통제가 되기도 한다. 아마도 1년에 한번 정도 열리는 마을 노래자랑대회 실력도 이 빨래터에서 다듬어졌던 것이 아닐까.


▲마포천/2007년 무렵 새롭게 정비되었다.


▲마포천/아이들의 물놀이 양상도 예전과는 다르다.


여름철 초저녁에는 목욕탕

이 멋지게 굽이진 시냇물의 용도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재미있는 장면은 여름철 초저녁에 이루어진다. 시골에 무슨 목욕탕이 있겠는가. 더운 여름이 오면 하루 종일 논에서 들에서 김매랴 잡풀 뜯어내랴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들어오는 농부들이 피곤한 몸을 등목을 대신하여 차가운 시냇물에 씻어버린다.
하루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주는 시냇물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하루의 여름 햇볕에 달구어진 몸뚱이를 등이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시냇물 속에 담그면 그보다 좋은 낙원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도시인들이 아무리 화려한 사우나를 즐긴다 하더라도 옛날 우리 동네 농부들이 즐겼던 시냇물의 맛은 모르리라. 왜냐하면 한바탕 참기 어려운 노동 후에 와야 진정한 휴식의 단맛을 알기 때문이다. 옛말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쓴맛을 봐야 진짜 단맛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고사성어로 어린 시절 농부들을 결코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겪은 노동이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자연은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눈감고 방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시냇물 같은 선물을 주어 휴식을 취하게 했으니 말이다.
시냇물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밤의 다음 시간대에 존재한다. 어른들이 시냇물에 하루의 노고를 씻어버리고 집으로 들어가면 부끄러움을 타는 수줍은 처녀들이 시냇가에 등장한다. 그들은 혹시 남의 눈에 띌까봐 시내의 약간 상류로 진출한다. 야밤에 혼자는 위험천만의 행위이고 결코 엄두도 안 나는 일이다. 그들은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처녀다운 경망한 속웃음을 서로 나누며 남정네들 몰래 비밀스러운 게임을 즐기는 양 밤 목욕을 하러 시냇가로 향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냇물 목욕은 낮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에로틱한 비너스 시녀들의 제의이다. 처녀들이란 몸을 순수하고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남성들의 약간은 거친 씻김 의식하고는 다르다. 그들의 하얀 살갗을 시냇물에 담그는 과정도 아주 조용하고 진지한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들은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게는 대단한 호기심을 발동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함부로 그곳에 몰래 가본다든지 훔쳐보는 것은 마치 신성모독의 행위처럼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물론 악동들이야 감행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상상 속에서 사랑에 대한 꿈을 꾸었으리라 믿는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박정근(대진대학교 영문과 교수)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