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절암과 백원루

부안 석동의 유절암과 최광지 홍패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로 신청

부안의 새로운 이야기

부안은 무궁한 개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땅이다. 물론 지리적 이점과 천혜의 자연 환경이 만들어준 덕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땅이 겪어온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그 가운데 형성된 부안의 정신은 오늘날 부안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소재이다. 이러한 자원은 새만금 시대의 역사적 깊이를 더하고, 부안의 위상과 가치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안의 정신문화로 대변되는 이야기꺼리는 관심과 개발이 필요하고, 이를 자원화하여 온전한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누리기에는 여전히 인내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부안은 천혜의 자연 환경을 즐기고, 맛을 보며, 마음을 단련하고 치유하는 단순 관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서해안 시대의 전진기지로서 부안의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원을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하여 생동감 넘치는 부안을 보여줄 때가 다가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안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보고자 한다.


▲유절암


▲유절암중수기

부안읍 연곡리 석동의 유절암(留節庵)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은 우리나라 최초 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백운동서원)보다 11년 전에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자리한 곳이다. 도동서원은 1534년(중종 29)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지포 김구(止浦 金坵)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 뒤 김여맹(金汝孟)·최수손(崔秀孫)·성중엄(成重淹)·최필성(崔弼成)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8년(숙종 44) 김석홍(金錫弘), 그 뒤 홍익한(洪翼漢)·김계(金啓)를, 순조 때에 김해(金垓)를 추가 배향하였다. 이곳에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여 지금은 도동서원지라는 표석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전하고 있다.
도동서원지 너머에는 부안 사람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절암(留節庵)이 있다. 유절암은 유절재(留節齋)로도 불리며, 전주 최씨 송애군파 종회로 사용되는 곳이다. 송애(松涯)는 최광지(崔匡之)의 호이다. 최광지는 전주 최씨로 전주 한벽당의 주인인 월당 최담의 장남이다. 월당과 그의 네 아들 최광지, 최직지, 최득지, 최덕지 중 득지를 제외한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주를 근거지로 삼던 이 전주 최씨 가문이 이곳 부안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때는 최광지의 장남 최생명에 이르러서이다. 옹암 최생명은 부안 옹정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부안 김씨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전주 최씨가 이곳 부안 김씨 소유의 땅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후대까지 깊은 뿌리를 내리게 만들 수 있있다. 이러한 연고로 이들은 그로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부안읍 연곡리 석동산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후대에 석동산 소유의 문제로 부안 김씨와 전주 최씨 사이에 300년간 송사로 머리 아프게 만든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지만 최생명이 이곳에 자리 잡아 후학을 양성하는 집안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부안 김씨와 더불어 전주 최씨가 부안을 대표하는 성씨가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주 최씨가 부안에 터전을 마련케 한 사람이 최생명이라면 유절암을 창건한 사람은 최생명의 장남이자 도동서원에 배향된 인물인 최수손이다. 최수손은 유절암이 자리한 곳에서 여묘(廬墓)하고 예를 마친 후에 그 터에 집을 짓고 유절(留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유절암 중수기에 의하면 유절(留節)이라고 이름 한 것은 궁핍하여도 절개를 지키며, 오직 절개 있는 삶을 쫓아 자손을 훈계하는 가풍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전한다. 이러한 가풍은 자손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쳐 최수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하였고, 최필성과 최계성은 효심이 남달라 효자정려를 받았다. 정려는 유절암 입구인 백원루(百原樓) 양쪽에 나란히 걸려있다.


▲석동산 전주 최씨 송애군파 선산


▲효자 최필성 묘

고려 최광지(崔匡之) 홍패(紅牌)

전주 최씨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문과자와 생진과 입격자를 배출하여 명실공히 부안 지역의 명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최광지로부터 비롯된 송애공파는 중종 때에 최순성(崔順成), 최극성(崔克成), 최위(崔渭), 최명룡(崔命龍) 등 대대로 다수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따라서 유절암에는 다수의 고서와 고문서가 대대로 전하였다고 하나 후손들의 관심 부족으로 지금은 그 수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이 가문의 몇몇 고문서는 지역사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월당 최담의 장남인 최광지의 과거 합격증이 바로 그것이다. 최광지의 홍패가 부안의 유절암에 보관되었던 것은 아마도 최광지의 장자 집안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유절암에 대대로 전해진 듯하다.
이 홍패는 최광지가 1389년(홍무 22년, 창왕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것이다. 문서에는 ‘성균생원(成均生員) 최광지(崔匡之) 병과3인(兵科三人) 급제자(及第者)’라고 기록되었으며, ‘홍무22년 9월 일(洪武二拾二年玖月 日)’이라 간기(刊記)하고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 찍혀져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름에 따라 문서 좌측의 ‘왕지’로 추정되는 글자가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이 홍패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하버드옌칭도서관 소장)에 최담과 최광지가 고려 말의 문과자로 수록되어 있고, 방목에 의하면 최광지가 생원으로 있다가 1389년에 실시된 기사방의 병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포은 정몽주의 학맥을 이어 이학(理學)에 전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문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문서의 내용 중 ‘홍무(洪武)’라는 연호를 자세히 보면 ‘무(武)’를 피휘(避諱)하여 기록하였다. 이는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피휘’란 문장에서 임금이나 높은 이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삼가는 뜻을 표하기 위해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나 획의 일부를 생략하는 것을 말한다.
최광지의 홍패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문서가 현존하는 고려 말의 몇 장 안 되는 문과 급제증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은 공민왕 때 구미리 양씨의 홍패와 양식이 다르고, 오히려 조선시대 홍패 양식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 홍패로의 양식 변화가 이미 창왕 때에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 사례인 것이다. 따라서 홍패 양식의 변화상을 추적하는데도 최광지의 홍패는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홍패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1102년(숙종 7) 을과 급제자에게 홍패와 안장을 얹은 말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 고려시대 최초의 예이고, 현재 1205년(희종 1)에 급제한 장양수(張良守)의 홍패가 전해오고 있으며, 1305년(충렬왕 31)에 급제한 장계(張桂)의 홍패가 보물 제5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최광지 홍패는 지난해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로 신청하였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올해에 문화재로 지정될 예정이다.


▲고려 최광지 홍패


▲『등과록전편』에 기록된 최광지

전통을 넘어 부안의 콘텐츠로

아직도 부안에는 발굴되지 않은 소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많다. 유절암과 홍패는 새로운 이야기 개발의 시작에 불과하다. 전통시대 부안 김씨와 전주 최씨가 부안을 대표하는 성씨였다고 하나 이와 연계하여 콘텐츠의 개발은 전무하다. 대부분 원형을 상실하였고,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부안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되고, 희소성의 가치를 풍부하게 지닌 고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원을 촘촘히 엮어내어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지역성을 상징하는 콘텐츠를 적극 발굴해 간다면 향후 새만금 시대를 열어가는 부안의 정신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석동산에 위치한 유절암과 이와 관련된 전주 최씨의 다양한 이야기가 부안의 새로운 콘텐츠가 되기를 기대한다.

/최우중(전주시청 학예연구사)

<부안이야기 12호>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