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05-31 (12:11)
부안의 역사적 인물들에서 삶의 미래를 보다-1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615

 

▲월명암


'부설거사' 월명암을 창시하다
부안의 역사적 인물들에서 삶의 미래를 보다-1

 

들어가며선사시대 혹은 역사시대 이래 부안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몇이나 될까.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총 인구수를 대략적으로 헤아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문헌이나 묘비 따위에 이름이 남겨진 ‘역사인’들을 제외하고서는 그들은 ‘살았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연의 흙 속으로 돌아간 무명인 혹은 민초로서 존재했다. 그들은 역사시대에 생존했으나 정작 ‘선사인’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수천 년 역사를 일구고 지속시켜 온,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으나 부안 역사의 주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을 뒤로 하고, 여기에서 내세우는 ‘부안의 역사인물’이라 함은 그렇게 역사적으로 선택된 소수의 역사인들 중 특별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 불과 몇 명으로 한정된다. 특히, 항일독립운동이나 근대적 교육운동 등 개화기 이후 전근대사회를 벗어나 현대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따라 지역사회 혹은 한국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들이 급증한 것도 사실이나 한정된 지면에서 그 모두를 ‘부안의 역사인물’로 올릴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부안의 역사인물 사전’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부안의 역사인물’은 특정인물의 역사적 행위(사상, 문학 등을 포함)에 대한 의미 있는 평가가 가능한 인물로 표상할 수 있다. 역사인물은 그 인물이 생존한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기반을 두고 그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특정인을 부안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물로 내세운다 하더라도 과장되게 신화화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 지역의 인물이라 하여 지역주의적 온정주의에 쏠려 과대포장하는 것은 객관적 평가를 어렵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안의 역사인물’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 시간적 범주로 보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포괄하되 현대는 생존자일 경우는 제외한다. 둘째, 신분적 범주로 보면 신분여하를 막론한다. 셋째, ‘부안의 역사인물’이라고 할 만한 지역적 근거는 크게 1) 부안에서 태어나 탁월한 활동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 2) 부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부안에 들어와 오랫동안 살면서 탁월한 활동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 3) 부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부안에서 오랫동안 살지는 않았으나 부안에 역사적 상징의 자취를 크게 남겨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 등이다.
그리고 이런 기준으로 선정한 인물들은 단순히 어떤 업적을 남기고 어떤 활동을 했느냐 그 자체에 치중하기보다, 업적이나 활동과 관련하여 그 인물의 생각(사상)이 무엇이었을까 혹은 그 인물의 삶의 방식 및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요약적이지만 가능하다면 이런 점에 주목하려 한다. 역사적 주체성을 중시해보려는 태도다. 서술방식에 있어서도, 인물들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인물의 개요를 작성하기보다 가급적 구체적 특이점들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따라서 ‘부안의 역사인물’들은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부안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사회적이고 지역적이며 의미 있는 역사적 상징성들을 초역사적으로 비추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안에서 주목하지 않는 부안의 역사인물들

많은 부안의 역사인물 중에서 여기에 5대 인물을 소개한다. 고대의 부설거사와 현대의 박중빈, 백정기, 최순환, 박영근 등이며, 이들은 부안의 역사인물들임에도 부안에서 주목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부설거사는 변산의 대표사찰 중 하나인 월명암의 창건자로 알려져 있으며 『부설전』으로 전해오는 것처럼 그 울림이 작지 않다. 소태산 박중빈은 원불교의 창시자로 변산에 거주하면서 제법성지를 일으킬 정도로 변산에서의 삶의 의미는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항일독립투사인 백정기는 부안출신이면서도 정읍의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최순환은 부안에서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낳은 희생자이다. 그 상징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부안의 역사인물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변산 출신이며 젊은 나이에 타계한 박영근은 크게는 신석정의 시정신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 노동자시인이지만 부안에서 존재감조차 없다. 이들 모두는 부안의 역사인물로 평가받아 부안의 삶-사상을 풍부하게 확장하는 콘텐츠로도 부족함이 없다.


월명암을 창시하다
부설거사(浮雪居士, ?~?)

변산면 중계리의 쌍선봉 정상 자락에 위치한 월명암은 내소사, 개암사와 함께 변산반도 천여 년의 불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자 손꼽히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691년에 창건된 이래 수많은 고승들이 수도한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바로 이 월명암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고승이 부설거사이다. 거사는 남자 재가신도를 말한다. 부설거사는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와 더불어 세계 불교 3대거사로 흠모와 존숭을 받아온 것으로 전해지는 설화적 인물로 의상, 원효와 함께 7세기에 활동하였던 우리나라 고승이다. 이들은 모두 변산에서 수행했다. 부설거사에 대한 이야기는 구비설화로 전해 내려왔으며, 그의 생애, 행적, 일화, 선시 등을 소설적 담론으로 표현한 『부설전浮雪傳』은 나중에 한문 필사본으로 월명암에서 발견되었다. “此竹彼竹化去竹(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로 시작되는,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팔죽시八竹詩> 등이 여기에 실렸다.


▲부설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 월명암에는 부설거사의 행적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연대와 작자 미상의 「부설전(浮雪傳)」이 전한다. 내용은 부설거사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의 행적과 그가 쓴 4부시(賦詩), 그리고 8죽송(竹頌)으로 되어 있는데 4부시와 8죽송의 글씨체가 서로 다르다. 한지 7장을 1면으로하여 총 15면으로 되어 있으며, 1면은 10행이고 매행은 14자이다. 총 2,616자이다.

『부설전』에 따르면 신라 진덕여왕 초 서라벌 남쪽 향아마을에 범상한 아이가 있어 이미 어릴 적에 깨달음을 얻었다. 진광세陳光世라는 이 아이의 법명이 부설浮雪이었다. 그는 같은 뜻을 품은 영조와 영희 두 벗과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두류산(지리산)과 천관산을 거쳐 능가산(변산) 법왕봉에서 선정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으며 다시 문수보살이 머무는 오대산 도량으로 향하던 도중 김제 두릉杜陵의 백련지白蓮池 옆에 있는 구무원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의 노인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묘화妙花였다. 묘화가 부설의 설법하는 소리에 반해 부부가 되자고 간청하였고 결국 부설은 이를 받아들여 두 벗과 이별을 고하고 재가수행으로 정진하였다. 세월이 오래 흘러 영조와 영희 두 스님은 명산을 편력해 다니다가 부설을 찾았다. 이때 부설은 물을 가득 담은 병 셋을 준비해 각자 치도록 했다. 영희와 영조가 병을 치자 병이 깨지면서 물이 흘러 나왔다. 부설 또한 병을 쳤는데,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 들보에 매달려 있었다. 부설은 두 선사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두루 지식을 찾아 오랫동안 총림叢林을 돌아다녔는데, 어찌 만물의 나고 죽음이 무상하고, 공空과 환상이 법法을 지어냄을 알지 못하는가? 지금까지 쌓아온 업業이 자유로운지 자유롭지 못한지를 징험徵驗해 보고, 평상시의 마음이 평등한지 평등하지 않은지를 알아보고자 하여 오늘 그리 하였던 것인데, 그대들은 자유롭지도 못하고 평등하지도 못하였네. 예전에 엎질러진 물을 담아보자고 경계했는데, 함께 행하자던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그 후 부설은 일념으로 단정히 앉아 허물을 벗고 열반에 들었다. 두 선사는 부설을 추모하고 명계와 양계의 온갖 무리들을 위한 명양회冥陽會를 열었는데, 호남의 선비들과 서민들이 구름처럼 도량에 모여들었다. 묘화는 백십 세를 누렸는데, 죽음에 이르려 하자 살던 집을 내놓아 원院을 세우고, ‘부설’이라 일컬었으며, 또 산문의 석덕碩德들이 부설거사의 두 자녀의 이름으로 암자를 지으니 지금까지 ‘등운’과 ‘월명’이라는 이름으로 일러온다. 부설거사 일가족이 월명암에서 득도를 한 것이다.

/고길섶(문화비평가)

<변산바람꽃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 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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