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05-03 (14:49)
[위도의 역사-1]섬을 비우는 정책과 위도사람들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1868

▲망월봉에서 본 위도의 섬, 섬, 섬ⓒ부안21

 

"위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위도의 역사-1]섬을 비우는 정책과 위도사람들

 

 

위도(蝟島)는 고려시대 이래 부령현에 속했다가 조선시대 말에 전남 지도군에 잠깐 편입된 적이 있다. 그리고 1915년부터는 전남 영광군에 속하다가 1963년에 다시 전북 부안군에 편입된다. 위도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섬 생활이란 게 하루하루 끼니 때우기도 쉽지 않았고, 고기잡이 나선 위도사람들은 갑자기 불어 닥친 풍랑과 싸우느라 자신들의 얘기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안군 위도면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이유로 낙후를 면치 못했다. 이곳에는 가난한 자들의 땀과 모진 고난을 자신들만이 감내해야 한다며 외롭게 싸웠던 사람들의 피 같은 절규와 기억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위도의 역사를 간략히 풀어가기 위해서는 편의상 열쇠 말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열쇠 말은 ‘공도(空島, 섬 비우기) 정책’, ‘위도진’, ‘조기파시’ 등이다. 이 세 가지 열쇠 말로 어찌 위도의 역사를 다 담으리오마는 위도 사람들의 삶에 접근하기 위한 작은 연결 고리로 삼고자 한다.


위도에서 사람들이 살게 된 때는

2만 여 년 전 위도를 포함한 부안군 바다는 육지였다.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모두 하나의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빙하기여서 해수면은 지금에 비해 140미터나 낮은 곳에 있었다.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지구를 덮고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자 육지 곳곳은 물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계속 상승하여 2천여 년 전에는 현재와 비슷한 해안선이 생겨나고 위도를 비롯한 칠산 바다는 몇 개의 산봉우리를 섬이라는 이름으로 물속에 남겨놓았다.

섬 지방에서 현재까지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사람의 흔적은 신석기인일 것이다.1)김영회, 『섬으로 흐르는 역사』, 동문선, 1999, 18쪽. 위도에서 선사시대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현재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위도와 가까운 격포 주위의 변산 일원에서는 신석기 유물들이 흔하게 발견된다는 증언이 있다.2)고수영 증언, 변산서중학교 교장. 또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변산면의 대항리 패총은 해변을 따라 조개미마을 바닷가 언덕에 묻혀 있는데 신석기 유적이다. 변산과 위도가 맞닿은 육지였다고 생각할 때 위도에서도 신석기인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정이다.

위도가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이다. 전라도 고부군 보안현에 대한 설명에서 현재 쓰는 위도(蝟島, 虫벌레충)가 아니라 위도(猬島,犭개사슴변)라는 한자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서에 이름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위도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도 사람들의 삶터 가운데 주목되는 곳은 치도리이다. 갯벌이 발달한 치도리 앞바다에는 두 개의 딴치도가 있어서 풍랑이 일 때 방파제 역할을 할 여건이 되었다. 치도리 뒤편에는 깊은금이 있는데 물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적당하고 농사짓기가 가능해서 지금도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치도리 주변 깊은금 쪽에서 대형 돌방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은 60여 기에 달하는데 고대 위도에 대형 취락지가 존재했을 가능성과 함께 국제 교역의 요충지로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돌방무덤은 백제의 전형적인 묘의 형식인데 위도의 돌방무덤은 3~4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물로 보면 위도가 백제 초기부터 중앙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따르면 여기서 발굴된 동전은 송나라 휘종 년간(1102~1108)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고, 고려시대 투구로 보이는 것도 발견되었다. 용궁의 모습이 새겨진 기와 등도 발견된다.

치도리에서는 4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돌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사신들이 양쯔강 하구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간 기착지인 위도에서 개경으로 항해할 때 무사안녕을 비는 뜻에서 당시 해변에 묻었던 비석으로 해석한다. 돌의 재질이 일반적인 화강암이나 현무암이 아닌 백석(차돌)으로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며 중국에서는 양쯔강 하류에서 생산된다. 제주도 해안이나 광양, 영광 등 남서해안 바다 속에서 어부들의 그물에 석상이 들려 올려진 사례들이 있는데 불교와 토속신앙이 결합된 미륵불 신앙이다. 이것은 풍어와 무사항해의 염원과 관련 있다.3)「부안서림신문」, 1999. 10. 25.

험한 바다를 항해하던 고대인들은 항해하기 전에 해안가나 섬에서 풍랑이 잔잔해지기를 빌며 제사를 지냈다. 격포의 수성당도 그것의 하나이고 위도 대리의 원당제나 치도리 뒤쪽에 있는 내원암도 그런 염원을 구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과 구전을 종합하면 치도리는 위도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항구로 추정되며 외부인들이 위도에 들어가는 들머리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위도와 부안 앞바다(동여도)/1856~1859, 김정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섬을 비우는 정책과 위도사람들

고려 말에는 공도(空島) 정책을 써서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다. 강봉룡은 이 공도 정책은 고려 때 삼별초 난에 동조한 서남해의 해상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며, 왜구와 섬사람들의 연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4)강봉룡, 『바다에 새겨진 한국사』, 한얼미디어, 2005, 227쪽.

고려 말 공도 조치는 해양국가 고려의 해양력을 약화시키고 바다를 지킬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극렬한 왜구 침탈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주장도 이어진다.5)강봉룡, 위의 책, 230쪽.

공도 조치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강화되고 전면화 되어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아갔다. 관의 허락 없이 섬에 몰래 들어간 자는 장 100대의 형으로 다스렸으며, 심지어 섬에 도피·은닉한 죄는 본국을 배반한 죄에 준하는 것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 되었다.

섬은 해안 어민들에게 어업 생산의 중요한 장이었고 생활 근거지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섬이란 국왕의 지배와 보호가 미치는 통치의 대상이 아니었고, 행정 편제의 대상에서도 배제되었다. 따라서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는 것은 곧 국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남을 의미했다.

점차 섬은 왜구의 소굴로 변해갔고, 그럴수록 조정에서는 섬에 거주하는 것을 더욱 엄금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동시에 왜구들이 섬 주민이나 해안가 주민들과 연합하여 해적처럼 약탈하고 해안가 사람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등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위도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를 키운 것은 병선을 만들기 위함이었다.6)『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1448. 8. 27.  

공도 정책으로 섬을 비웠다면 위도에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았을까? 조선 초기의 자료에는 위도에 어전(漁箭, 어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어와 석수어(조기)가 잡히는 주요 산지로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어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유승선(柳承善)은 위도 등의 섬에서 이루어지는 관리들의 부패와 어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명종 14년(1559)의 유승선의 상소에,

어전의 폐단도 근래에 더욱 심하여 어부가 안접(安接)하지 못하고 깊숙이 해도로 들어가는 실정입니다. 지금 청홍도의 저도와 부안 땅 위도 등도 다 수사지(受賜地)로 되어 그 작폐가 무수한데다가 병사와 수사의 횡포까지 심합니다. 그러므로 어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사방으로 이산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왕자와 부마들이 하사받은 어전은 일시에 다 반환시킬 수는 없으나 거리가 먼 곳의 것은 속공(屬公)시켜 어부들이 안접하도록 하심이 옳을 듯합니다.7)『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 1559. 2. 9.
  
양란 이전에 위도 어전의 수세권을 성균관에서 가졌음도 나타난다.8)『조선왕조실록』 효종 6년, 1655. 7. 24. 공도 정책을 쓰는 동안에도 위도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관의 눈을 피해 섬으로 들어가 살면서 어업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정재철(전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3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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