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05-03 (14:53)
[위도의 역사-2]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다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1847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1호)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위도의 역사-2]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다

 

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다

공도 정책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숙종 년간이다. 위도 등 섬에 수군진(水軍鎭)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그 규모에 따라 첨사·만호·별장 등의 지휘관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섬을 지키는 군사적 임무 이외에 행정적인 수령의 업무까지 겸하였으니, 이는 곧 섬에 주민의 거주를 공인하고 사실상 공도 정책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안 사람 김몽두(金夢斗)는 숙종 7년(1681)에 위도에 진을 설치하도록 상소를 올렸다.9)『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 1681. 3. 17. “위도의 형편을 말하고”라 되어 있는데, 여기서 형편은 위도에 사람들이 살지만 왜구의 침입과 관의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발생하는 여러 폐해를 말했음 직하다. 숙종 8년(1682)에 위도에 수군진을 설치하고 임치·고군산·산목포·다경포·법성포·검모포·군산포·신도의 8보를 위도에 소속시켰다.

숙종 9년 첫 위도 첨사로 임명된 이송노(李松老)는 부임 직후에 위도에 관아를 지었다. 객사용으로 2칸 팔작지붕 건물을 짓고 이곳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奉安)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이처럼 대례를 행하는 것은 진장(鎭將)으로서 역할 뿐 아니라 수령으로서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조선후기 전라도 부안현 위도어전의 구관분규와 수세문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4, 32쪽.

위도가 처음부터 종 3품인 무관 첨사(僉使, 僉節制使의 약칭)가 관장하는 큰진(巨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은 어획량도 많고 진장이 어세를 관리하도록 하여 진의 재정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강화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격포가 강화도의 ‘목구멍(咽喉)’으로 인식되면서 위도와 함께 진을 강화하여 강화도의 방어에 힘썼기 때문이다.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위도에는 인구 증가가 따랐다. 섬에 들어가는 입도(入島)가 합법화되면서 육지에서 곤궁함을 면키 어려워진 사람들이 어염(魚鹽)의 이익을 좇아 섬으로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다. 섬 주민들이 소지한 족보를 통해서 처음 섬에 들어간 각 성씨별 입도조(入島祖)를 파악하면 대부분이 수군진 설치를 전후한 시기에 섬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11)강봉룡, 같은 책, 301쪽.


◀위도진영도(조선후기 지방지도, 규장각 소장)

위도는 일찍부터 우리나라 주요 유배지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때 이규보, 조선에 들어와서는 장찬, 유명견, 이명회, 여선장, 김치후, 이훙종, 윤태연 등이 위도에 유배되었다.

조선 초에는 위도에 귀양이 없다가 위도진이 들어서면서 유배지로 활용된다. 중죄인을 유배형으로 보내는 것은 죄인을 감시할 수 있는 국가의 군사 행정기구가 있는 곳에서만 집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섬에 대한 인식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생각이 강하여 숙종 년간에 처음 섬에 유배를 보냈을 때는 ‘너무 잔혹한 처사’라는 말도 있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에 유배되는 경우는 죄과가 매우 높은 양반에 해당된다. 이런 섬에 귀양살이를 떠나는 것을 절도안치(絶島安置, 외딴섬에 격리함)라 했는데 가족을 떠나 일반인들과 격리된 유배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이 유배인을 위도 사람들이 돌보아야 했는데 섬 주민 자체가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돌보기가 쉽지 않았으니 그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탄환만한 섬 위도에서 일어난 일

고종 1년(1864)에 위도첨사 김윤항(金潤恒)이 탐욕하고 불법한 일을 저질러 그 죄상이 해당 관청에 알려졌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그런데 하소할 곳 없는 백성들이 그들의 침해와 학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곳곳이 그러하니, 어찌 가엾은 노릇이 어니겠는가? 이런 자들을 한번 호되게 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탄환만한 조그마한 섬에서 3,000냥이나 탐오(貪汚)하는 큰 죄를 저질렀으니, 양심도 없고 두려움도 모르는 행동으로 더욱 극히 해괴한 일이다.”12)『조선왕조실록』, 고종 1년, 1864. 3. 1.

위도를 ‘탄환만한 조그마한 섬’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섬에서 3,000냥이나 되는 거액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끌어 모았으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해당 수사(水使)가 위도 첨사 김윤항을 군사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 30대를 엄하게 친 다음 멀고 험악한 섬에 보내어 종으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위도는 섬이라는 구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외부에 죄상을 알리기도 쉽지 않았고 첨사가 불법을 저지르고 억울한 일을 위도 사람들에게 강요해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첨사는 섬 안의 전제군주였던 셈이다.

위도가 전략적인 요지인 것은 사실이나 배를 정박할 만한 곳도 없고 위도에 속한 군인들은 위도를 떠나 훈련할 때면 큰 풍랑에 몸을 맡겨야 했다. 훈련 중에 배가 파선되어 100여 명이 죽는 사고도 잇따랐다.

전라도 위도진의 군졸 1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으니, 휼전(恤典) 거행을 명하였다.13)『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 1713. 8. 16.

여기서 과연 위도 수군진의 군졸들은 누구였을까. 위도의 일반 백성들일 가능성이 크다. 정부에서는 섬사람들을 단속해서 대오를 만들고 시시때때로 무예를 익히도록 했다. 위도·격포·군산·검모포 등 4진이 수영에 이속되어 봄과 가을에 춘범(春帆)과 추범(秋帆)으로 수군을 조련하러 군산에 갔다가 배가 패몰되거나 물에 빠져 죽는 방졸(防卒)이 속출했다. 칠산바다의 위험을 실록은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위도면 치도리에서 출토된 석상

칠산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노삼노(長老三老, 노련한 뱃사공)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14)『조선왕조실록』, 영조 1년, 1725. 4. 19.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정재철(전백산고등학교 교감)

<부안이야기 13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 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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