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03-31 (14:46)
[위도 기행] 여럿이 함께 걷는 땅, 위도!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3407

 

▲위도 파장금ⓒ부안21

"고기가 잡히지 않는 섬에서.."
[위도 기행] 여럿이 함께 걷는 땅, 위도!

 

지난 7월의 어느 한여름 날, 『부안이야기』 조사팀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위도를 만나러 떠났다. 12호 태풍 ‘할롤라’를 품은 잿빛 하늘이 가파른 한숨을 바다에 뿜어내고 있었지만 카훼리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큼하게 뱃길을 열었다. 승객들의 모습은 한눈으로 봐도 여러 가지다. 읍내 장을 다녀오는 이, 말쑥한 차림으로 고향길에 오른 이, 잔뜩 멋을 부리고 여행길에 오른 이, 승선 사유는 제각각이지만 마음은 하나, ‘그 섬에 가고 싶다!’ 풍성한 황금어장 칠산바다. 영광 법성포에서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해역에 7개의 섬이 한 식구처럼 모여 있는 이 바다의 중심은 위도이다. 고슴도치가 웅크린 형상이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이름으로 얻은 섬,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는 설명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운 섬이다.


파장금에서 위도를 열다


◀위도 파장금항ⓒ부안21


아침 9시 50분에 격포항을 출발한 배는 40여 리 서해 바닷길을 달려 50분 만에 파장금 선착장에 승객들을 내려놓는다.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하는 파장금은 모든 것을 삼킬 듯 당당하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먼저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작년 세월호 침몰사고를 겪으며 새삼 주목을 받았던 1993년의 참사는 인간의 욕심과 안전 불감증으로 292명의 목숨을 바쳐야 했던 뼈저린 아픔이다. 그 모진 일을 겪고도 우리는 자연 앞에서 겸손히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진리 마을로 접어들어 만난 위도 관아는 이 섬의 옛 위상을 잘 드러내주는 유적이다. 위도는 우리나라 섬 들 중에 유일하게 관아가 남아있는 섬이다. 1682년(숙종 8)에 처음 설치되었다는 이 관아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며 전라우수영의 관할구역 절반을 담당했다고 한다. 지금은 동헌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옛 위용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전략적 거점이었던 이곳의 중요성을 새삼 짐작케 해준다. 마루에 앉아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다 문득 눈을 돌려보니 담 곁에 늘어선 비석들만이 무성했던 한때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파장금(波長金) ‘섬마을횟집’에서 얼큰한 우럭탕으로 허기진 속을 다스린다. 숱한 식당들이 문을 닫아 이제는 이 섬의 몇 안 되는 명물로 남았다. 파도가 오래 치면 돈이 쏟아진다는 뜻의 이 항구는 한때 전국에서 모여든 어업선들로 불야성을 이루던 전성기가 있었다. 어부들이 몰고 온 배가 1㎞ 건너편 식도까지 이어져서 정박된 배를 딛고 걸어서 건너갈 정도였다고 하니 그 장관이 감히 상상이라도 되는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파시가 열렸고 전국에서 모여든 돛배들이 닻을 내리고 황금조기를 잡아 올리곤 했다. 춘삼월, 조기는 서해로 북상하기 시작하여 오뉴월에 황해도 해주와 진남포 앞까지 올라가는데, 조기가 지나가는 길목인 이곳 해안의 모래밭에는 술과 웃음을 파는 시장이 성황을 이뤘다. 우산을 둘러쓰고 돌아보는 안쪽 고삿길 좁은 골목에는 폐허에 가까운 옛 정취들이 애틋한 연민의 정을 자아낸다. 한때 30여 곳이 넘는 술집과 여관, 장사꾼들로 북적였다는 이곳에 지금은 빈집들만 덩그라니 남아 그날의 영화를 침묵으로 말해준다. 부산집, 목포여인숙, 인천관 등 간판들만 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둥지를 틀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도 파장금 뒷골목/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파시가 열렸고, 30여 곳이 넘는 술집과 여관 등이 어부들과 장사꾼들로 북적였다는 이곳에 지금은 빈집들만 덩그라니 남아 그날의 영화를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다.ⓒ부안21


위도에서 달빛보고 걷기

파시가 문을 닫으며 이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왔지만 천혜의 관광명소 위도의 아름다움은 한 치도 줄어들지 않았다. 해안과 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형성되었던 뱃사람들의 휴식처 위도는 빼어난 천연자원으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여전히 잡아끈다. 휴식이면 휴식, 낚시면 낚시, 생태탐사면 또 생태탐사, 어느 하나 명소로 손색이 없다.


▲위도해수욕장ⓒ부안21


▲위도팔경 중의 일경인 망봉제월(望峰霽月)/망월봉 위로 떠오르는 달ⓒ부안21


▲위도해수욕장 주변에 핀 위도상사화ⓒ부안21


절경의 산과 바다는 풍광이 으뜸이다.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솔향기 뿜어내는 망월봉(높이 255m) 오솔길을 비롯하여 도제봉, 망금봉으로 이어지는 구릉을 오르내리노라면 빼어난 산세에 수려한 바다 풍광을 덤으로 누려 마음이 절로 상쾌해진다. 위도해수욕장은 고운 모래사장이 백미이다. 어항처럼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1km 남짓의 백사장은 맑은 자갈모래가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루어 더없이 아늑하다. 멀리 왕등도도 그림처럼 예쁘게 펼쳐지고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전국에서 으뜸이다. 미영금 몽돌해수욕장을 비롯하여 깊은금, 논금 등 이름도 어여쁜 숨은 해변들은 물놀이에 최고다.

섬 일주는 1999년에 위도 관광순환도로가 개설되면서 편리해졌다. 뱃시간에 맞춰 운행되는 위도공영버스를 타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구석구석 섬을 누비는 기쁨이 쏠쏠하다. 26km 남짓 굽이굽이 수려한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며 해변을 바라보노라니 빼어난 비경이 매혹적이다. 뭍에 올라보겠다고 몇천 년째 기를 쓰고 있는 거북바위를 비롯하여 악어, 뱀, 물개를 쏙 닮은 바위들이 해안 곳곳에서 노닐고 있다. 시시콜콜한 섬 정보를 감칠맛 넘치게 전하는 백은기 기사의 입담에 잠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관광객들은 연신 탄성을 지른다. 버스요금은 단돈 3,500원,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온 섬을 충분히 보고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위도는 천혜의 자원을 지녔다. 우선 생태계의 보고라는 점은 가장 큰 자산이다. 이 섬은 조기, 삼치, 고등어, 키조개 등 다양한 어종이 꾸준히 몰려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이 없어 산과 바다마다 각종 희귀식물과 바다생물이 넘쳐난다. 수달, 검은머리물떼새, 황조롱이, 매, 원앙 등 천연기념물 5종이 이곳에서 발견되었으며, 괭이갈매기, 백할미새 등 38종 2천여 개체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위도에서 처음 채집되어 고유 학명을 갖게 된 위도상사화를 비롯하여 열대성 상록활엽수인 푸조나무, 수백 년 묵은 팽나무, 후박나무 숲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남방계 청띠제비나비 등 희귀 곤충들도 이곳에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진리당숲/변산반도 끝지점인 격포에서 서쪽으로 14km에 위치한 위도는 육지와 다른 식물상을 보이고 있다. 진리에서 벌금 가는 길 중간 서편의 야트막한 당제산(도제봉) 언덕 위에 있는 진리당숲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후박나무, 동백나무는 물론이려니와 육지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참식나무, 까마귀쪽나무, 붉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그 밖의 이름 모를 남방계식물들이 북상해 원시 숲을 이루고 있어 숲속은 대낮에도 컴컴하다.ⓒ부안21


▲구실잣밤나무, 붉가시나무, 참식나무ⓒ부안21


낚시꾼의 천국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본섬의 서쪽 해안가와 식도, 딴달래섬, 새끼섬의 거의 모든 곳이 낚시 포인트라고 한다. 봄부터 6월말까지는 우럭과 놀래미가, 4월부터 6월에는 감성돔이, 7월 중순 이후 가을까지는 농어가 제철이다. 넘쳐나는 어종만큼이나 어량 또한 풍부하여 초보자들에게도 마음껏 고기 낚는 기쁨을 선사하니 이 얼마나 넉넉한 해심(海心)인가!

이처럼 아름다운 위도의 풍광 덕에 문화 명소로의 이름도 높아졌다. 2002년에 논금해수욕장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촬영이 이루어졌고, 위도해수욕장에서는 2011년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가 열리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축제의 장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는데, 지난 8월에는 ‘제1회 위도상사화 필 무렵 섬마을 달빛보고 밤새걷기 축제’가 열렸고, 10월에는 ‘달빛보고 밤새걷기 축제’를 열어 콘서트와 캠프파이어 등 어울림 마당을 펼치기도 하였다.


애틋한 전설과 아픔을 지니고

이틀을 돌아보았는데도 섬은 아직 숱한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다. 현실 저편에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더 애틋하고 신비하다. 위도는 홍길동이 세우려 했다는 율도국의 배경이라는 설로도 유명하다. 아직 여러 견해가 있지만, 부안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변산반도 우반동에 머문 적이 있던 허균이 멀리 보이는 위도를 이상국 삼아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으리라는 설명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나라를 꿈꾸었던 홍길동,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율도국은 풍요로운 자원과 자연을 갖추었으되 누구든지 부지런만 하면 잘 살 수 있는 섬, 위도라고 보아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격포로 돌아오는 바닷길에서 만난 임수도 해역은 심청이가 몸을 던진 인당수라는 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실제 여부를 떠나 이곳은 어민들이 두려워할 만큼 물결이 세기도 하고, 1993년 서해훼리호를 삼킨 곳이기도 하다. 후에는 어떻게 사람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느냐는 임금의 질책에 따라 돌로 사람을 만들어 제물로 대신 바쳤다고 하는데 그 주장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곳 해역에서는 석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마침 풍랑이 거센 날에 이 해역을 지나다 보니, 길고 험한 바닷길을 달래기 위한 뱃사람들의 설화가 한층 애절하게 읽힌다. 상심한 중에도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고군산군도는 바닷길에서 만난 오랜 동무마냥 친근하고 반갑다.


▲임수도/최근에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가 바로 이곳 위도의 ‘임수도’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부안21


▲위도 대리에서 본 형제섬/6·25 무렵 미군이 동생섬을 폭격 연습 대상으로 삼은 통에 섬의 수면 위쪽 절반 정도가 날아가고 말았다.ⓒ부안21


들어갈 때 바다갈매기의 재롱에 홀려 미처 보지 못했던 치도리 앞바다의 형제섬도 애틋하기는 매 한가지이다. 이 섬은 지난 세기에 모진 수난을 겪었다. 6·25 무렵 미군이 동생섬을 폭격 연습 대상으로 삼은 통에 섬의 수면 위쪽 절반 정도가 날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폭격음 때문에 8, 9㎞ 거리의 위도 주민들은 집이 흔들리는 공포에 떨어야 했고, 가축들은 뱃속의 생명을 낙태하는 피맺히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날이면 날마다 폭탄을 온몸에 뒤집어 써야했던 동생의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겠지만 그 참혹함을 지켜보는 형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형제가 물밑으로 서로 끌어안고 토했던 통곡은 저 거친 파도소리로도 덮을 수 없었으리라.

그림처럼 곱고 넉넉하면서도 애틋함을 간직한 위도는 그렇다고 마냥 평화롭기만 한 섬은 아니다. 이 섬은 특히 근래에 깊고 강렬한 아픔들을 겪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2003년 방사능폐기장 건립을 둘러싼 사태, 최근 새만금방조제 축조 등은 쉬이 아물지 않을 짙은 생채기를 냈다. 특히 요즈음은 주민들의 얼굴에 그늘이 한층 깊다. 새만금방조제 축조의 여파가 이 섬을 직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조제를 쌓은 이후 뻘이 퇴적하여 해수면이 매년 몇 cm씩 높아지고 있다. 대리 앞 큰 바위가 물막이 공사 이후 바다에 잠겼고, 이전에 30톤급 어선도 들어오던 항구에 지금은 5톤 선박도 진입이 어려울 정도이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섬에서

주민들의 삶은 궁핍하다. 막심한 어업 피해는 말과 글로 다 옮길 수 없다. 조기는 끊겼고 바지락에는 뻘이 가득하다. 새만금과 위도 사이의 인공어초가 뻘에 묻혀 물고기 산란도 크게 줄었다. 어장이 죽고 어업이 죽으니 생계수단도 막히고 있다. 인구유출은 심하여, 10월말 현재 주민등록상의 위도 인구는 1,300명도 못되며, 치도리의 위도초등학교는 식도 분교 소속을 포함하여 학생 총 19명에 교직원 18명이 전부다.

정말이지, 한때 위도는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예컨대 주민들은 해방 후 3년쯤 되던 해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대리와 치도 앞바다 3km 구간에 멸치가 한없이 몰려들어 바다 색깔이 새카맣게 변했던 기억이 그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속옷 바람으로 함께 멸치를 퍼 올리던 추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렬히 남아있다. 이런 마을이 지금 빠르게 황폐화 되고 있다. 화려한 옛 명성과 영광을 어디서 되찾으랴.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오늘, 개발이니 성장이니 이 모든 용어는 빛 좋은 허언일 뿐이다. 자연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빌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후손에게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사정이 이렇다보니 위도 주민들의 상실감과 소외감은 극심하다. 갖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 주민들 사이에 갈등의 골도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어느 주민은 한때 위도가 전라남도에 속해 있던 때를 떠올리며 “차라리 위도를 전남으로 반환하면 아래로 내려가서 어업이라도 가능할 터인데 지금 전북 해역에서는 살길이 막막하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또한 눈앞의 어려움을 타개하려면 공동협업이 가능한 산업시설 등의 확보가 절실하고, 무엇보다도 위도가 겪는 어려움을 대변할 인물이 간절히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칠산바다는 옛날의 명성을 잃었지만 위도는 풍광이 여전히 아름답고 노을빛은 언제까지나 넉넉할 것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벗어나 휴식이 필요할 때 섬을 찾는 여행객들과는 달리, 섬사람들에게는 이곳이 언제까지나 지켜나가야 할 치열한 삶의 터전이다. 따라서 풍요로웠던 위도의 어제들은 가파른 오늘과 마땅히 손잡아야 한다. 위도의 자랑 ‘띠배’에 아픔과 갈등을 모두 실어 보내고 새로운 희망의 내일들을 만나야 한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노래한다. 그의 섬은 고립되거나 외롭지 않다. 위도 역시 언제까지나 머무르고 싶은 섬이고, 그 섬에는 사람이 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섬 위도, 우리 함께 그 섬을 살자.

/김중기(부안여자고등학교 교사)

<부안이야기 13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 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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