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6-05-31 (13:14)
부안의 역사적 인물들에서 삶의 미래를 보다-2
글쓴이 : 권정숙 조회 : 2700

 

원불교제법성지(부안군 중계리 사자동)/원불교 창교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원불교 교법을 마련한 곳



 

'박중빈' 변산 제법성지를 일으키다
부안의 역사적 인물들에서 삶의 미래를 보다-2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원불교를 창건한 교조로, 호는 소태산少太山이며 원불교에서는 대종사라 부른다. 그는 전남 영광군 백수에서 태어났으므로 영광 사람임이 틀림없으나 부안의 역사적 인물로서의 의미 또한 크다. 왜냐하면 영광이 소태산이 태어나 교리를 터득한 원불교의 근원성지인 반면 부안의 변산은 소태산이 5년간 체류하며 교리를 선포한 제법성지로 중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고대 때부터 고승들이 수행한 발자취들이 남아 있는 변산을 성소聖所의 의미로 확장한 셈이다. 소태산은 어릴 때 영민하여 범상치 않았으며 7세 때부터 우주와 자연현상에 대해 종교적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11세 때 산신령을 만나기 위해 산중 마당바위에서 5년간 기도를 올렸다 한다. 그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는 숱한 일화와 함께 우상숭배는 허망하다고 깨닫는 등 어떤 스승도 없이 일련의 구도 행각을 한 특이점들을 보여준바, 그가 26세가 되는 1916년 4월 28일 새벽 은연중에 지혜가 밝아져 자신이 깨쳤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대각大覺이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개교일로 정하고 있다.
그 이후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는 10인 1단의 방식으로 제자 조직에 힘썼는데, 특이한 것은 집을 떠나지 않고 수도하고 제자들도 모두 주변의 사람들이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반 이상이 증산교나 천도교를 신봉하던 이들이었다. 그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대각의 안목으로 당대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관망하며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교단 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그를 따르는 아홉 제자와 함께 1917년 저축조합을 세우고 허례폐지, 미신타파, 금주단연, 근검저축 운동을 펼쳤으며, 거기서 저축된 자금으로 1918년에 간척사업을 이끌었다. 이 와중에 진행된,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 대아실현의 표본을 보여주는 법인기도를 마치고 소태산은 1919년 몇몇 제자들과 함께 변산(대종경 천도품 25장에 따르면, “어느 날 아침 영광에서 부안 변산 쪽을 바라보니 허공 중천에 맑은 기운이 어리어 있는지라……”라고 적혀 있다)에 들어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교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변산은 원불교의 제법성지로서 성소적 의미를 지니는데, 월명암과 실상사지 일대(실상초당터, 석두암터, 구곡로, 정산로, 용두샘 등)가 거기에 해당된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
<사진출처 : 『원불교대사전』(원불교100년기념사업회)>


『대산종사』에 따르면, 변산성지는 “천하의 대도요 만고의 대법인 일원의 원만한 진리에 근원하여 세계평화의 원리로 사은의 원만한 신앙과 보은의 법을 밝혀주셨고, 세계 균등의 원리요 대도인 사용의 원만한 치국치평법을 밝혀주셨고, 만생령 부활의 원리요 대도인 삼학의 원만한 수행법을 밝혀주신 대성지이다.” 변산의 봉래구곡과 관련한 성리법문이 있다.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변산구곡로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들으니 없고 없다 하는 것도 또한 없고 없으며 아니고 아니다 하는 것도 또한 아니고 아니로다)하면서 이 뜻을 알면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 했다. 실지불공 이야기도 유명하다. 어느 날 길을 가는 노부부에게 소태산이 물었더니 며느리가 하도 말을 안 들어 실상사에 불공드리러 간다고 했다. 소태산이 그 답을 내놓았다. “두 분은 생명이 없는 등신불에게는 불공을 드릴 줄 알면서 살아 있는 부처에게는 왜 불공을 드리지 않느냐. 며느리가 바로 살아 있는 부처입니다. 바로 이 부처에게 공을 들여야지 등신불에게 불공을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두 분께 효도하고 불효하는 직접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 바로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선 소태산은 불공에 들어갈 돈을 며느리에게 쓰라고 권했다. 그 말대로 하니 며느리가 개과천선했다는 것이다.

변산 시대 이후 소태산은 1924년에는 익산에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내걸고 선원禪院을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과 신도 훈련을 병행하며 교화의 기틀이 될 여러 가지의 법규들을 제정하였다. 1937년에는 대각한 진리를 일원상一圓相으로 상징하여 신앙과 수행의 표본을 삼도록 하는 일원종지一圓宗旨를 선포하였으며, 1943년에는 기본경전인 『불교정전佛敎正典』을 친감하여 발행하였다. 1943년 5월 ‘생사의 진리’라는 설법을 마치고 6월 1일에 열반하였다. 열반 후에 교단의 결의에 따라 그의 법위를 대각여래위大覺如來位로 받들고, 유해는 원불교 중앙총부의 대종사 성탑에 안치하였다. 오늘날 변산에는 변산성지를 수호하고자 하는 원광선원이 들어서 있다.

/고길섶(문화비평가)

<변산바람꽃 11호에서 옮겨왔습니다.>


 

(부안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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